Pray with the Pope

교황님 기도지향

2025년 8월 - 상호공존

 

<2025년 8월 교황님 기도지향 - 상호 공존>

공존이 더욱 어려워지는 사회들이 민족, 정치, 종교, 이념을 이유로 대립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글: 정홍철 신부)


얼마 전 산책을 하면서 하느님이 지으신 이 세상이 새삼 참 아름답다고 느끼는 찰나였습니다. 계절마다 그 모습이 바뀌는 나무와 풀, 꽃과 새들은 물론이요, 오랜 시간 사람들이 이룩해 온 문명과 발전의 산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려 할 때에 불현듯 '그런데 이 세상이 모두에게 아름다운가? 모든 사람이 이 아름다움을 충만히 누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제게 엄습했습니다. 분명 지금의 세상은 슬프고 비참한 이유들로 인해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대해 '아름답지만 숨겨져 있는 교회의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철저하고 또 절망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크고 작은 분쟁과 갈등, 그 어떤 승자도 없는 전쟁과 학살의 소식을 매일 접하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는 그저 이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 11,12) 이것은 비단 예수님 시대의 상황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고 우리의 약함과 두려움을 악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화와 공존은 아득히 멀리 있어 그저 꿈 속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기대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우리가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절망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과 이웃의 고통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잠깐 주목을 끌었다가 휘발되어 버립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슬픔에 지쳐버린 우리는 이제 단념하고 희망하기를 그만두라는 유혹에 시달립니다. '이 세상은 원래부터 그러했다. 세상은 늘 혼란스러우며, 이 혼란은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는 체념과 절망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는 분명히 '다른 길'입니다.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신 하느님의 창조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창세 1,31) 다시 말해서, 평화와 공존에 대한 체념은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에 대한 거부이며, 그것은 분명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을 짐짓 모른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가 앉든지 서든지 눈을 감고 회피하려 해도 계속 거기에 계십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이 땅에서도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선포하시고 다양한 비유로 설명해 주신 하느님 나라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당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1코린 11,24)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에 담긴 것처럼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요한 17,4) 그리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과 함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도록 초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적당주의'의 유혹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분쟁이나 폭력이 없을 때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안에 평화에 대한 깊은 갈망 없이는 평온한 상태는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소한 손해나 잠깐의 불이익은 참을 수 있을지 모르나, 과연 우리가 얼마나 또 어디까지 참을 수 있겠습니까? 버리는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의 기준은 철저하게 숫자에 기초를 둡니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이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로부터 인간성을 탈락시키고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이익과 이권을 위해 금전적 손익을 계산하고 사회적 효과를 계산하고 평판과 정치적 입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부수적 수입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무뢰배들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철저하게 협력하는 경우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평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은 일견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한 일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로 하여금 많은 애를 쓰고 손해를 감수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의 공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결국 자기 이익입니다. "무릇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와 이권에서 벗어날수록 모든 영적인 일에서 더 진보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영신수련, 189) 우리의 인색함과 부족한 인내심에 관한 문제는 그저 관대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말처럼 양보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부정하기 어려운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평화는 무엇에 기초하는가를 다시 성찰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려는 평화는 우리가 서로를 참을 수 있는 만큼 참아주는 것으로서 잠시 실현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또 우리에게 남기신 평화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으로서 실현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우리가 예수님의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이 권고를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평화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교회가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도록 권고하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