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 Jerome E. Breunig, S.J.
(제롬 부르닉 신부)
1980.07.15

1917년 9월 30일에 미국 위스콘신주 퐁뒤락(Fond du Lac)에서 태어나 1935년 9월 1일 예수회에 입회한 부르닉(일부 친구들은 그를 '제리'라고도 불렀다) 신부는 한국에서 사도직하는 예수회원 가운데 처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회원이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미주리 캔사스 시티에 있는 예수회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브루닉 신부는 1961년 11월 11일, 평화봉사단(U.S. Peace Corps)의 지도 신부로서 박후버(Andrew Bachhuber, S.J.) 신부와 함께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마켓 대학교에서 재직하던 그는 서강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한 학기 강의를 맡게 되어 1963년 2월 21일 다시 한국에 도착했다.
1967년 부르닉 신부는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초창기에 서강대학교 영어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번브락 신부가 건강 문제로 본국으로 돌아간 뒤, 부르닉 신부는 영문학과 학장(1969-1976)과 교양영어과 주임교수를 맡으며 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서강대학교에서 발간되던 여러 영어 잡지들 (Sogang Review, Sogang Herald 등)이 잘 발간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신입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마련했는데, “헤드 스타트(Head Start)”라는 과정을 만들어 신입생들이 입학 전 몇 주 동안 소그룹 안에서 외국인에게 직접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부르닉 신부는 서강대학교 학생들에게 자신의 정성과 사랑을 아낌없이 쏟았다. 그의 애정은 서강 동문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자주 하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천주교 신부로서 자식은 없지만, 여기 있는 서강인을 포함해 모든 서강 학생과 동문이 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자식이 결혼하는데 주례를 선다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1979년 1월 이미 심장마비를 한 차례 겪어 죽음에 이를 뻔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 요양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한국에 남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격동을 겪던 1980년 7월 15일, 62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결국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부르닉 신부의 유해는 용인에 있는 예수회 묘역에 묻혔다.
부르닉 신부의 장례식에는 학생들과 교직원, 교수들뿐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많은 서강 동문들이 찾아와 그의 삶을 기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매우 친절한 사제로 기억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브루닉 신부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다들 “He cared”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학생들을 사랑으로 돌보던 그의 따뜻한 영혼의 기운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늘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이다.
브루닉 신부는 생전에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나는 1964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로욜라 대학교에서 출판한 《진지 잡수셨습니까? (Have you had your rice today?)》이며, 다른 하나는 《Sogang University Essay》이다. 특히 《진지 잡수셨습니까?》는 만 부 이상이 출판되어 모두 완판되었고, 위스콘신 관구의 연학수사들이 이 책을 읽으며 선교에 대한 꿈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 Robert McIntosh(민기식) 신부의 회고 참조
Fr. Jerome E. Breunig, S.J.
(제롬 부르닉 신부)
1980.07.15
1917년 9월 30일에 미국 위스콘신주 퐁뒤락(Fond du Lac)에서 태어나 1935년 9월 1일 예수회에 입회한 부르닉(일부 친구들은 그를 '제리'라고도 불렀다) 신부는 한국에서 사도직하는 예수회원 가운데 처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회원이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미주리 캔사스 시티에 있는 예수회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브루닉 신부는 1961년 11월 11일, 평화봉사단(U.S. Peace Corps)의 지도 신부로서 박후버(Andrew Bachhuber, S.J.) 신부와 함께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마켓 대학교에서 재직하던 그는 서강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한 학기 강의를 맡게 되어 1963년 2월 21일 다시 한국에 도착했다.
1967년 부르닉 신부는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초창기에 서강대학교 영어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번브락 신부가 건강 문제로 본국으로 돌아간 뒤, 부르닉 신부는 영문학과 학장(1969-1976)과 교양영어과 주임교수를 맡으며 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서강대학교에서 발간되던 여러 영어 잡지들 (Sogang Review, Sogang Herald 등)이 잘 발간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신입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마련했는데, “헤드 스타트(Head Start)”라는 과정을 만들어 신입생들이 입학 전 몇 주 동안 소그룹 안에서 외국인에게 직접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부르닉 신부는 서강대학교 학생들에게 자신의 정성과 사랑을 아낌없이 쏟았다. 그의 애정은 서강 동문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자주 하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천주교 신부로서 자식은 없지만, 여기 있는 서강인을 포함해 모든 서강 학생과 동문이 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자식이 결혼하는데 주례를 선다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1979년 1월 이미 심장마비를 한 차례 겪어 죽음에 이를 뻔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 요양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한국에 남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격동을 겪던 1980년 7월 15일, 62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결국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부르닉 신부의 유해는 용인에 있는 예수회 묘역에 묻혔다.
부르닉 신부의 장례식에는 학생들과 교직원, 교수들뿐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많은 서강 동문들이 찾아와 그의 삶을 기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매우 친절한 사제로 기억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브루닉 신부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다들 “He cared”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학생들을 사랑으로 돌보던 그의 따뜻한 영혼의 기운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늘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이다.
브루닉 신부는 생전에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나는 1964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로욜라 대학교에서 출판한 《진지 잡수셨습니까? (Have you had your rice today?)》이며, 다른 하나는 《Sogang University Essay》이다. 특히 《진지 잡수셨습니까?》는 만 부 이상이 출판되어 모두 완판되었고, 위스콘신 관구의 연학수사들이 이 책을 읽으며 선교에 대한 꿈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 Robert McIntosh(민기식) 신부의 회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