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 이기석, S.J.
(이기석 베드로 수사)
1982.12.28

1936년에 태어난 이기석 수사는 한국에 수련원이 문을 열기 전 해외에서 수련기를 보낸 초기 한국 예수회원이었다. 그는 1960년 10월 3일, 평수사 지망으로 수련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이는 그가 일본어에 매우 능통하여, 미국에서 수련을 받는 것보다 일본에서 수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기석 수사는 가난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강대학교에서 책을 제본하는 일을 맡아 열심히 일했는데, 제본보다는 중·고등학교, 고아원, 소년원 등을 찾아가 종교 영화를 상영하고 함께 운동을 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그의 관심과 열정은 1978년 ‘이냐시오 야간학교(이하 이냐시오 야학)’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그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저녁 시간에 타자 수업(typing program)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원장에게 자문을 구했고, 공동체 회의를 통해 서강대학교 공동체 사도직의 일환으로 이냐시오 야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냐시오 야학은 낮 시간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마련된 비정규 고등학교로, 학생들은 이곳에서 공부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었다. 서강대학교 공동체의 원장에게는 야학의 교장이 당연직으로 주어졌다.
이냐시오 야학은 1978년 3월 이화여대 근처 가톨릭 청년 센터의 두 개의 작은 방에서 시작해서 1980년 1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 두 남학생은 서강대학교에 진학하였고 한 여학생은 간호대학교로 진학하여 후에 터키 이스탄불로 떠났다.
당시만해도 한국 지구는 이냐시오 야학을 이기석 수사 개인의 사도직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S.J.) 총장 신부가 직접 이냐시오 야학을 예수회의 사도직으로 인정하자 이기석 수사가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그가 가난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결국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된 데에는 자신의 체험이 밑바탕이 되었다. 이기석 수사 자신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쌓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석 수사는 언젠가부터 자주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도직 활동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후에 부비강암 혹은 후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1982년에 들어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당시 공동체 원장이던 기수현(Daniel Kister, S.J.) 신부는 병상에 누워 있던 이기석 수사에게 앞으로 야학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야학을 자신의 사명처럼 아꼈던 이기석 수사에게 그 약속은 무엇보다 따뜻한 위로이자 마지막 큰 기쁨이 되었다.
이기석 수사가 투병하는 동안 민 마이클(Michael Daniels, S.J.) 수사가 오랜 시간 곁을 지켰으며, 선종 석 달 전인 9월 27일에는 이한택 신부(당시 지부장)의 입회 아래 병상에서 예수회 최종 서원을 했다. 이기석 수사는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에 선종하였다. 그는 한국인 예수회원 가운데 처음으로 하느님 품에 안긴 회원이었다.
이기석 수사는 예수회가 제34차 총회에서 예수회원이 “남을 위해 사는 사람(Man for others)”이자 “남과 더불어 사는 사람(Man with others)”임을 천명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 정신을 사도직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예수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 즉 교육을 통하여 사회사도직의 문을 열었던 ‘첫 씨앗’으로 기억된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 기수현(Daniel Kister, S.J.) 신부 회고 참조
Br. 이기석, S.J.
(이기석 베드로 수사)
1982.12.28
1936년에 태어난 이기석 수사는 한국에 수련원이 문을 열기 전 해외에서 수련기를 보낸 초기 한국 예수회원이었다. 그는 1960년 10월 3일, 평수사 지망으로 수련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이는 그가 일본어에 매우 능통하여, 미국에서 수련을 받는 것보다 일본에서 수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기석 수사는 가난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강대학교에서 책을 제본하는 일을 맡아 열심히 일했는데, 제본보다는 중·고등학교, 고아원, 소년원 등을 찾아가 종교 영화를 상영하고 함께 운동을 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그의 관심과 열정은 1978년 ‘이냐시오 야간학교(이하 이냐시오 야학)’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그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저녁 시간에 타자 수업(typing program)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원장에게 자문을 구했고, 공동체 회의를 통해 서강대학교 공동체 사도직의 일환으로 이냐시오 야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냐시오 야학은 낮 시간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마련된 비정규 고등학교로, 학생들은 이곳에서 공부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었다. 서강대학교 공동체의 원장에게는 야학의 교장이 당연직으로 주어졌다.
이냐시오 야학은 1978년 3월 이화여대 근처 가톨릭 청년 센터의 두 개의 작은 방에서 시작해서 1980년 1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 두 남학생은 서강대학교에 진학하였고 한 여학생은 간호대학교로 진학하여 후에 터키 이스탄불로 떠났다.
당시만해도 한국 지구는 이냐시오 야학을 이기석 수사 개인의 사도직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S.J.) 총장 신부가 직접 이냐시오 야학을 예수회의 사도직으로 인정하자 이기석 수사가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그가 가난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결국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된 데에는 자신의 체험이 밑바탕이 되었다. 이기석 수사 자신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쌓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석 수사는 언젠가부터 자주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도직 활동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후에 부비강암 혹은 후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1982년에 들어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당시 공동체 원장이던 기수현(Daniel Kister, S.J.) 신부는 병상에 누워 있던 이기석 수사에게 앞으로 야학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야학을 자신의 사명처럼 아꼈던 이기석 수사에게 그 약속은 무엇보다 따뜻한 위로이자 마지막 큰 기쁨이 되었다.
이기석 수사가 투병하는 동안 민 마이클(Michael Daniels, S.J.) 수사가 오랜 시간 곁을 지켰으며, 선종 석 달 전인 9월 27일에는 이한택 신부(당시 지부장)의 입회 아래 병상에서 예수회 최종 서원을 했다. 이기석 수사는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에 선종하였다. 그는 한국인 예수회원 가운데 처음으로 하느님 품에 안긴 회원이었다.
이기석 수사는 예수회가 제34차 총회에서 예수회원이 “남을 위해 사는 사람(Man for others)”이자 “남과 더불어 사는 사람(Man with others)”임을 천명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 정신을 사도직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예수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 즉 교육을 통하여 사회사도직의 문을 열었던 ‘첫 씨앗’으로 기억된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 기수현(Daniel Kister, S.J.) 신부 회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