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emoriam

선종한 예수회원


Fr. 김태관, S.J.

Fr. 김태관, S.J.

(김태관 토비아 신부)

199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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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태어난 김태관 신부는 한국 예수회가 공식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이전인 1939년 4월 12일, 일본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첫 서원 후에는 일본 죠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에서 독일어 강사를 하던 중 벨기에로 유학을 떠나 성 알베르토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50년 그는 한국인 예수회원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 독일 뮌스터에서 예수회 제3수련을 하였으며 죠치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5년 2월 예수회의 한국 진출에 대한 공식 교령이 발표된 후에는 얼마간의 준비를 거쳐 같은 해 11월 25일 귀국하여 한국 사도직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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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군들과 함께)


김태관 신부는 1956년 4월부터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미대에서 종교사, 철학,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문화학 연구소(Institute of Culture Studies)’를 설립하여 소수 정예 학생들을 위한 학술 모임을 이끌었고, 일부 강의를 불어로 진행하기도 하였다.

1960년 서강대학교가 설립되자 그는 초창기 10명의 교수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철학을 가르쳤다. 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기획실을 조직하였으며, 동아시아에서 고등교육에 종사하는 예수회 대학 간 협력을 위한 국제회의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1962년에는 교구의 요청에 따라 대건신학교 철학과 교학 과장으로 파견되어 강의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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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서강대에서 강의)


김태관 신부는 1967년부터 예수회의 영성 사도직 기반을 마련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예수회 피정의 집인 ‘말씀의 집’ 건립 과정에서 초기 책임을 맡아 봉사하다가 1971년 초 사도직에서 물러났다. 말씀의 집은 1973년 1월 공식적으로 개원하였다.

한편 그는 1970년대 초 유신체제하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과거 지학순 주교를 변호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1974년에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았으며, 그 여파로 약 1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지내야 했다.

1984년에 들어서는 당시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 속해 있던 한국지부를 독립 지구로 승격하기 위한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학교 내규 위원회’와 ‘양성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봉사하며 한국 예수회가 예수회 동아시아 지역구 소속의 독립 지구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85년 서강대학교 개교 25주년을 맞아 정년퇴임한 그는 교육계에 기여한 공로로 같은 해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훈하였다.

1990년 4월 10일, 김태관 신부는 강의실에서 자연신학을 강의하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즉시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선종하였다. 그는 현대 한국에서 처음으로 예수회에 입회한 회원으로서 초기 한국 예수회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헌신했던 회원이었다. 그의 장례는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용인 예수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