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 안병태, S.J.
(안병태 알퐁소 신부)
1994.11.23

1931년에 태어난 안병태 신부는 한국 예수회의 첫 번째 지원자로서, 본래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가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1955년 9월 28일 도미하였다. 당시 부산항을 떠나 10박 11일만에 시애틀에 도착하였는데, 한국전쟁 와중에 경비절감을 위해 800달러가 드는 항공편 대신 300달러가 드는 군용물자 수송선을 타고 떠났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2일 위스콘신 어쉬커쉬(Oshkosh)에 위치한 예수회 수련원에 도착하여 수련을 시작하였다.

(1957년 첫 서원)
첫 서원 후 그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 이어 일본 죠치대학교에서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모든 양성과정을 마친 그는 1966년 4월 27일 귀국하였고, 이듬해 12월 12일 대건신학대학 학생처 차장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던 중 부제품을 받았다.
1968년 6월 27일, 그는 명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정대권(John D. Mace, S.J.) 신부 역시 함께 서품되었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온 250여 명의 하객이 참석하였다. 이날의 서품식은 한국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예수회 사제 서품 미사였다.

(1968년 사제 서품식)
서품 이후 그는 계속해서 신학생들을 지도하다가 1970년 서강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사목실장으로 봉직하며 학생 사목에 헌신하였다(1970~1982). 그는 학생들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어 신앙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이끌었고, 체계적인 교리 교육을 통해 다수의 학내 구성원들이 세례를 받고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82년부터 2년 간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 볼티모어 로욜라 대학교(현 Loyola University Maryland)에서 임상심리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예수회 한국지구가 독립 지구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안병태 신부는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6년 첫 양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내 신학대학원 설립을 위한 교과 과정 및 교수 인선 작업에 기여하였고, 1987년에는 한국 예수회의 향후 사도직 방향을 모색하는 준비위원회 위원으로도 봉사하였다.
1985년부터 서강대학교 예수회 공동체 원장을 맡은 그는 1991년 1월 11일 제2대 예수회 한국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시기(1985~1994) 서강대학교 이사장으로도 봉직하며 학교 발전에 헌신하였다.

(1991년 제2대 지구장 취임)
1994년 11월 13일부터 24일까지 그는 대만에서 열린 예수회 동아시아 지역구 장상회의에 참석하고, 이어 예수회 제34차 총회 대표 토론회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국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대만 도착 후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어 식사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진찰 결과 간암이 복부 여러 부위로 전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11월 23일 새벽, 안 신부는 호흡곤란으로 선종하였다.
시신은 11월 26일 한국에 도착하였으며, 11월 28일 이냐시오관 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봉헌되었다. 한국에서 예수회에 입회한 첫 번째 회원으로서, 한국 예수회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안병태 신부는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활발하게 교육현장에서 활동했으며 무엇보다 따뜻한 인품을 지녔던 그는 많은 서강 동문들에게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예수회원으로 기억되고 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참조
Fr. 안병태, S.J.
(안병태 알퐁소 신부)
1994.11.23
1931년에 태어난 안병태 신부는 한국 예수회의 첫 번째 지원자로서, 본래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가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1955년 9월 28일 도미하였다. 당시 부산항을 떠나 10박 11일만에 시애틀에 도착하였는데, 한국전쟁 와중에 경비절감을 위해 800달러가 드는 항공편 대신 300달러가 드는 군용물자 수송선을 타고 떠났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2일 위스콘신 어쉬커쉬(Oshkosh)에 위치한 예수회 수련원에 도착하여 수련을 시작하였다.
(1957년 첫 서원)
첫 서원 후 그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 이어 일본 죠치대학교에서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모든 양성과정을 마친 그는 1966년 4월 27일 귀국하였고, 이듬해 12월 12일 대건신학대학 학생처 차장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던 중 부제품을 받았다.
1968년 6월 27일, 그는 명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정대권(John D. Mace, S.J.) 신부 역시 함께 서품되었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온 250여 명의 하객이 참석하였다. 이날의 서품식은 한국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예수회 사제 서품 미사였다.
(1968년 사제 서품식)
서품 이후 그는 계속해서 신학생들을 지도하다가 1970년 서강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사목실장으로 봉직하며 학생 사목에 헌신하였다(1970~1982). 그는 학생들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어 신앙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이끌었고, 체계적인 교리 교육을 통해 다수의 학내 구성원들이 세례를 받고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82년부터 2년 간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 볼티모어 로욜라 대학교(현 Loyola University Maryland)에서 임상심리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예수회 한국지구가 독립 지구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안병태 신부는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6년 첫 양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내 신학대학원 설립을 위한 교과 과정 및 교수 인선 작업에 기여하였고, 1987년에는 한국 예수회의 향후 사도직 방향을 모색하는 준비위원회 위원으로도 봉사하였다.
1985년부터 서강대학교 예수회 공동체 원장을 맡은 그는 1991년 1월 11일 제2대 예수회 한국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시기(1985~1994) 서강대학교 이사장으로도 봉직하며 학교 발전에 헌신하였다.
(1991년 제2대 지구장 취임)
1994년 11월 13일부터 24일까지 그는 대만에서 열린 예수회 동아시아 지역구 장상회의에 참석하고, 이어 예수회 제34차 총회 대표 토론회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국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대만 도착 후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어 식사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진찰 결과 간암이 복부 여러 부위로 전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11월 23일 새벽, 안 신부는 호흡곤란으로 선종하였다.
시신은 11월 26일 한국에 도착하였으며, 11월 28일 이냐시오관 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봉헌되었다. 한국에서 예수회에 입회한 첫 번째 회원으로서, 한국 예수회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안병태 신부는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활발하게 교육현장에서 활동했으며 무엇보다 따뜻한 인품을 지녔던 그는 많은 서강 동문들에게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예수회원으로 기억되고 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