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 Basil M. Price, S.J.
(배바실 신부)
2004.09.29

배바실 신부는 1923년 6월 18일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태어났다. 미국 크레이튼 대학교를 다니던 중 1941년 8월 17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943년에 첫 서원을 했으며,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라틴어 학사, 철학 및 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캠피언 고등학교에서 잠시 가르친 후에는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 6월 16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수련원 시절부터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깊이 품고 있었으며, 매년 장상에게 해외 선교지 파견에 대한 뜻을 간절히 피력하였다. 이러한 오랜 열망이 결실을 맺은 듯, 1957년 11월 14일 배바실 신부는 34세의 나이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인천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설립 준비 단계에 있던 서강대학교의 창립 멤버로서 그는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강단에 서는 일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과 기초 인프라를 구축하는 다양한 실무에도 헌신하였다. 1960년 개교 이후 1988년 정년퇴임 때까지 4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학생들과 학교를 위해 변함없이 봉사하였다.

(서강대학교 본관 모형을 내려다보는 모습)
그는 1966년 6월,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문제 전문연구소인 서강대학교 산업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노동자와 노조 간부, 기업 경영인, 정부 실무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 1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을 교육하며 노동법과 단체교섭,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에 관한 실질적인 지식을 전했다. 이 연구소는 2000년 문을 닫기까지 35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배바실 신부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예수회 한국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부터 1975년까지 한국 예수회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1977년 최종서원을 마쳤고,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서강대학교 총장보이자 국제관계 자문으로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1970년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하여 20여 년간 간사로 활동하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인권과 정의 수호에 앞장섰다.

그의 삶은 검소함과 겸손함으로도 널리 기억된다. 전기와 종이를 아껴 쓰며, 자신이 받은 선물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생활은 그가 실천한 복음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는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학생들과 가까이 호흡했고, 동문들과도 깊은 유대감을 나누었다.

배바실 신부는 2004년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으나, 병원 입원을 거부하고 사제관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선종에 앞서 남긴 “It will certainly be a new adventure”라는 말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믿음의 여정으로 받아들인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2004년 9월 29일 오후 7시, 배바실 신부는 하느님 품에 안겼다. 47년 동안 한국 땅에서, 그리고 44년 동안 서강대학교에서 헌신했던 그는 용인 예수회 묘지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선종으로, 서강 설립에 헌신했던 마지막 미국인 예수회원이 이 땅의 사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참조
더 읽기: 바실 프라이스와 산업문제 연구소
Fr. Basil M. Price, S.J.
(배바실 신부)
2004.09.29
배바실 신부는 1923년 6월 18일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태어났다. 미국 크레이튼 대학교를 다니던 중 1941년 8월 17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943년에 첫 서원을 했으며,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라틴어 학사, 철학 및 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캠피언 고등학교에서 잠시 가르친 후에는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 6월 16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수련원 시절부터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깊이 품고 있었으며, 매년 장상에게 해외 선교지 파견에 대한 뜻을 간절히 피력하였다. 이러한 오랜 열망이 결실을 맺은 듯, 1957년 11월 14일 배바실 신부는 34세의 나이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인천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설립 준비 단계에 있던 서강대학교의 창립 멤버로서 그는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강단에 서는 일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과 기초 인프라를 구축하는 다양한 실무에도 헌신하였다. 1960년 개교 이후 1988년 정년퇴임 때까지 4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학생들과 학교를 위해 변함없이 봉사하였다.
(서강대학교 본관 모형을 내려다보는 모습)
그는 1966년 6월,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문제 전문연구소인 서강대학교 산업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노동자와 노조 간부, 기업 경영인, 정부 실무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 1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을 교육하며 노동법과 단체교섭,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에 관한 실질적인 지식을 전했다. 이 연구소는 2000년 문을 닫기까지 35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배바실 신부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예수회 한국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부터 1975년까지 한국 예수회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1977년 최종서원을 마쳤고,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서강대학교 총장보이자 국제관계 자문으로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1970년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하여 20여 년간 간사로 활동하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인권과 정의 수호에 앞장섰다.
그의 삶은 검소함과 겸손함으로도 널리 기억된다. 전기와 종이를 아껴 쓰며, 자신이 받은 선물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생활은 그가 실천한 복음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는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학생들과 가까이 호흡했고, 동문들과도 깊은 유대감을 나누었다.
배바실 신부는 2004년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으나, 병원 입원을 거부하고 사제관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선종에 앞서 남긴 “It will certainly be a new adventure”라는 말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믿음의 여정으로 받아들인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2004년 9월 29일 오후 7시, 배바실 신부는 하느님 품에 안겼다. 47년 동안 한국 땅에서, 그리고 44년 동안 서강대학교에서 헌신했던 그는 용인 예수회 묘지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선종으로, 서강 설립에 헌신했던 마지막 미국인 예수회원이 이 땅의 사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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