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 진성만, S.J.
(진성만 베드로 신부)
2008.08.02

진성만 신부는 1915년 일제강점기 경남 거제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38년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사제의 소명을 품고 있었으나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는 사제 양성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벨기에로 건너가 홀토렌시 고등학교에서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격변 속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소가 예수회에 있음을 자각하였다. 1940년 5월 15일 일본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해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S.J.) 신부에게서 수련을 받았으며, 1942년 5월 16일 첫 서원을 발하였다. 동경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1947년 벨기에로 건너가 앵기엔 신학부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1949년 7월 24일 한국인 최초로 예수회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프랑스에서 제3수련을 마친 그는 1951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1952년 최종 서원을 하였다. 일본과 유럽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양성 과정을 마친 진 신부는 한국을 떠난지 거의 23년만인 1965년 6월 20일 테오도르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S.J.) 신부가 주도한 한국 최초의 예수회 공동체에 합류하기 위해 마침내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는 예수회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58년 세례자들과 함께)
진 신부는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서강대학교 설립 부지를 물색하고 매입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57년 1월, 예수회는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약 6만 7천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였고, 본격적인 설계·건축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0년 개교 이후 진 신부는 학교법인 서강대학 초대 이사 4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으며, 1962년 제3대, 1964년 제4대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뒤에도 이사로 활동하며 학교의 교육 방향 수립에 기여하였다.

(서강대학교 설립에 힘쓴 초기 회원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그를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제5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으로 선정하였다. 수상식에서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 서강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모두 다 제가 못난 탓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눈물을 흘려 참석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러나 그가 서강대학교 설립의 주춧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서강의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진성만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명동 수녀원의 지도신부로 봉직했으며, 이후 예수회 말씀의 집 원장(1973–1975), 명동성모병원 원목신부(1975–1979)로 사목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79년에는 예수회 총장인 페드로 아루페 신부의 제안을 받아 파라과이 선교지에 파견되어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 및 일본인 가톨릭 공동체를 위한 선교사로 봉사하였다. 당시 이미 64세였던 그는 스페인어를 새롭게 익히고 선교에 나서는 열정을 보였다. 귀국 후 나길모 굴리엘모(William J. McNaughton, M.M.) 당시 인천 교구장의 요청으로 인천 영종도 본당 주임신부를 지내는 등 사목 현장에서 평생을 헌신하였다.

(81세 생일 잔치)
1990년대 이후 진 신부는 수련원에 거주하며 후배 예수회원들의 삶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사제로서, 그리고 서강대학교 설립의 산 증인으로서 묵묵히 공동체의 역사와 함께했다. 2008년 8월 2일,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취하던 중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그의 선종으로 서강 설립 당시를 기억하는 마지막 예수회원이 역사 속으로 떠나게 되었다.
진성만 신부는 오토바이를 즐겨 타던 순수한 소년 같은 인상을 지녔으며, 조용하고 겸손한 삶으로 서강의 반세기 역사를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서강대학교와 예수회 한국 사도직의 역사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참조
Fr. 진성만, S.J.
(진성만 베드로 신부)
2008.08.02
진성만 신부는 1915년 일제강점기 경남 거제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38년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사제의 소명을 품고 있었으나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는 사제 양성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벨기에로 건너가 홀토렌시 고등학교에서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격변 속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소가 예수회에 있음을 자각하였다. 1940년 5월 15일 일본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해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S.J.) 신부에게서 수련을 받았으며, 1942년 5월 16일 첫 서원을 발하였다. 동경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1947년 벨기에로 건너가 앵기엔 신학부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1949년 7월 24일 한국인 최초로 예수회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프랑스에서 제3수련을 마친 그는 1951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1952년 최종 서원을 하였다. 일본과 유럽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양성 과정을 마친 진 신부는 한국을 떠난지 거의 23년만인 1965년 6월 20일 테오도르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S.J.) 신부가 주도한 한국 최초의 예수회 공동체에 합류하기 위해 마침내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는 예수회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58년 세례자들과 함께)
진 신부는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서강대학교 설립 부지를 물색하고 매입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57년 1월, 예수회는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약 6만 7천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였고, 본격적인 설계·건축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0년 개교 이후 진 신부는 학교법인 서강대학 초대 이사 4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으며, 1962년 제3대, 1964년 제4대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뒤에도 이사로 활동하며 학교의 교육 방향 수립에 기여하였다.
(서강대학교 설립에 힘쓴 초기 회원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그를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제5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으로 선정하였다. 수상식에서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 서강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모두 다 제가 못난 탓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눈물을 흘려 참석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러나 그가 서강대학교 설립의 주춧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서강의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진성만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명동 수녀원의 지도신부로 봉직했으며, 이후 예수회 말씀의 집 원장(1973–1975), 명동성모병원 원목신부(1975–1979)로 사목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79년에는 예수회 총장인 페드로 아루페 신부의 제안을 받아 파라과이 선교지에 파견되어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 및 일본인 가톨릭 공동체를 위한 선교사로 봉사하였다. 당시 이미 64세였던 그는 스페인어를 새롭게 익히고 선교에 나서는 열정을 보였다. 귀국 후 나길모 굴리엘모(William J. McNaughton, M.M.) 당시 인천 교구장의 요청으로 인천 영종도 본당 주임신부를 지내는 등 사목 현장에서 평생을 헌신하였다.
(81세 생일 잔치)
1990년대 이후 진 신부는 수련원에 거주하며 후배 예수회원들의 삶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사제로서, 그리고 서강대학교 설립의 산 증인으로서 묵묵히 공동체의 역사와 함께했다. 2008년 8월 2일,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취하던 중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그의 선종으로 서강 설립 당시를 기억하는 마지막 예수회원이 역사 속으로 떠나게 되었다.
진성만 신부는 오토바이를 즐겨 타던 순수한 소년 같은 인상을 지녔으며, 조용하고 겸손한 삶으로 서강의 반세기 역사를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서강대학교와 예수회 한국 사도직의 역사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예수의 벗: 한국에서의 50년》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