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emoriam

선종한 예수회원


Fr. 정일우, S.J.

Fr. 정일우, S.J.

(정일우 요한 신부)

201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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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우 신부(John V. Daly, S.J.)는 1935년 11월 21일 미국 일리노이주 파일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 안에서 공동체의 따뜻함을 배웠다. 세인트 토마스 초등학교(1941–1949)와 캠피언 고등학교(1949–1953)를 졸업한 후, 1953년 8월 8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연학 수사 시절 그는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학사 및 석사)하며 예수회 영성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져갔다.

1960년 9월 21일, 25세의 젊은 예수회 연학 수사 정일우는 화물선을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던 날, 그는 처음 배운 한국말 “감사합니다”를 도둑에게까지 연습하며 한국과의 첫 인연을 맺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서강대학교에서 영어회화와 철학을 가르치며 선교사로서의 기반을 쌓았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가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963년 그는 신학 연학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 세인트루이스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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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연학 수사들의 합창)


1966년 6월 8일 사제 서품을 받은 정일우 신부는 1967년 한국으로 돌아와 수련원 부수련장과 수련장을 맡으며 젊은 예수회원들의 양성에 헌신했다. 서강대학교에서도 신학을 강의(1968–1974)하며 학문과 사목을 병행했다. 이 시기 그는 시대의 어둠을 목격했다. 1972년 유신 정권하에서 학생들이 연행되는 사건을 계기로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언론 탄압에 항의해 명동 거리로 나갔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국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어요”라는 경찰의 말에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나요?”라고 답했던 일화는 그의 사제직이 단지 제대 앞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 11월 6일, 그는 최종서원을 통해 예수회 사제로서 자신의 사명을 굳건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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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2월, 정일우 신부는 교단과 강단을 떠나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같은 지붕 아래서 먹고 자며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제정구를 만나 일생의 동지가 되었다. 그는 철거민과 빈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강제 철거에 맞서 비폭력 저항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그는 ‘빈민 사목의 대부’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양평동 판자촌으로 거처를 옮겨 공동체 생활을 이어갔으며, 1977년 ‘복음자리’ 마을, 1979년 ‘한독주택 마을’을 세우며 강제 이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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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동지였던 제정구와 함께)


1980년대 서울은 올림픽을 앞두고 대규모 철거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정 신부는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돕고,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며 가난한 이들이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길을 함께 모색했다. 이 활동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시초라 불리는 〈상계동 올림픽〉에 기록으로 남았다. 1985년 ‘목화마을’을 건립하며 그의 사목은 도시 빈민운동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도시빈민사목위원으로 활동하고, 1986년 제정구와 함께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걸어온 그의 삶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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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정 신부는 충북 괴산으로 내려가 누룩공동체를 세우고 농촌 사목을 시작했다. 그는 “농약은 논밭의 생명, 농부, 먹는 사람 모두를 죽인다”고 말하며 우렁이농법 등 유기농법을 실천했다. 마을의 청년들과 함께 땅을 일구며 ‘가난한 농부가 주체가 되는 경제’라는 새로운 실험을 이어갔다. 그는 헛간으로 변한 낡은 농가에서 단칸방을 쓰며 살았고, 생산·유통·소비의 정의로운 순환을 몸소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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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2005년까지 그는 독립문에 위치한 예수회 한몸공동체 초대 원장을 맡아 상처 입은 이들의 회복을 돕는 사목에 전념했다. 이후 예수회 성 이냐시오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며 후배 사제들에게 자신의 신앙과 삶을 물려주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마지막 시기에도 그는 “슬퍼하지 말고 즐겨라. 내 장례를 축제처럼 지내라.”는 말을 남겼다. 2014년 6월 2일, 정일우 신부는 79세를 일기로 하느님 품에 들었다.

정일우 신부는 도시와 농촌, 철거 현장과 교실, 판자촌과 예수회 공동체를 오가며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다. 그의 사목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에 서는 벗이었다. 그가 세운 복음자리·한독주택·목화마을과 누룩공동체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도시와 농촌의 민중운동과 교회 사목 안에 살아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수많은 후배 예수회원들의 기억 속에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아, 그들이 한국 사회의 가장 가난한 자리로 조금 더 깊이 걸어 들어가도록 이끄는 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