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 Robert K. McIntosh, S.J.
(민기식 신부)
2018.11.24

민기식 신부는 1940년 7월 11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라난 그는 성 요한 주교좌성당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밀워키 주립대학교 정치학과를 다니던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랐다.
1959년 9월 3일,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며 문학 및 철학 학사(1965)와 라틴문학 석사(1966)를 취득했다.
1966년 8월 8일, 민 신부는 예수회 한국지부에 파견되어 서강대학교에서 영어와 라틴어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배우며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던 젊은 연학 수사는 곧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1968년 한국어 경연대회에서 3등을 수상)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와 신학 석사를 취득하고 1972년 6월 8일 미국 밀워키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곧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강대학교에서 교양영어 교수로 재직하며 30년 넘게 교육 사도직에 헌신했다.

(1968년 민기식 수사의 강의)
민 신부의 사도직은 강단을 넘어 공동체와 교회 안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1977년 최종 서원을 통해 예수회원으로서의 소명을 더욱 굳건히 했으며, 1978년부터 교양영어과정부를 맡아 학생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봉사했다.
1980년대부터 그는 공동체의 여러 책임을 맡았다. 예수회 부수련장(1986), 교육감(1985–1989), 지구장보(1985–1986), 말씀의집 부원장(1987–1989) 등, 한국 예수회 초기 공동체의 기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에는 양성담당(1993–1994), 부관구장(1994–2005)으로서 후배 사제들의 성장과 형성을 위해 헌신했고,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아루페 공동체 원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그의 지도 아래 많은 젊은 사제와 수사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도직의 길을 걸어갔다.

(2005년 부관구장으로 일하는 모습)
민 신부는 단지 현장의 사목자이자 교육자일 뿐 아니라 예수회 한국관구의 고문서실 담당으로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2002년부터 선종하기까지 문서와 자료를 정리하며 한국 예수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역사를 단순히 보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공동체의 뿌리와 기억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한편 1978년부터 1983년까지 그는 정일우 신부와 함께 ‘복음자리’ 운동에 참여했다. 철거민과 도시 빈민을 위해 함께 살고 일하며 복음을 삶으로 나누었던 시간이었다. 이 경험은 그의 사제직에 깊은 영적 자취를 남겼다.
2018년 11월 24일, 민기식 신부는 휴가차 고향을 방문하던 중 미국 위스콘신주 여동생의 집에서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미국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된 후 유골은 한국으로 옮겨져 12월 11일 예수회 센터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다. 그의 장례미사에는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한 동료, 제자, 교직원, 그리고 친구들이 함께했다. 그는 용인 예수회 묘역에 묻혔다.
민기식 신부는 교육자로서, 공동체의 봉사자로서, 또 예수회의 역사를 지킨 사람으로서 조용하지만 강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화려한 언변보다 성실한 삶으로, 앞서기보다 곁에서 동행하는 태도로,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빛으로 남아 한국 예수회의 역사를 이끌어온 한 시대의 증인이 되었다. 민기식 신부의 헌신과 특유의 유머, 그리고 겸손한 삶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
Fr. Robert K. McIntosh, S.J.
(민기식 신부)
2018.11.24
민기식 신부는 1940년 7월 11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라난 그는 성 요한 주교좌성당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밀워키 주립대학교 정치학과를 다니던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랐다.
1959년 9월 3일,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며 문학 및 철학 학사(1965)와 라틴문학 석사(1966)를 취득했다.
1966년 8월 8일, 민 신부는 예수회 한국지부에 파견되어 서강대학교에서 영어와 라틴어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배우며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던 젊은 연학 수사는 곧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1968년 한국어 경연대회에서 3등을 수상)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와 신학 석사를 취득하고 1972년 6월 8일 미국 밀워키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곧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강대학교에서 교양영어 교수로 재직하며 30년 넘게 교육 사도직에 헌신했다.
(1968년 민기식 수사의 강의)
민 신부의 사도직은 강단을 넘어 공동체와 교회 안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1977년 최종 서원을 통해 예수회원으로서의 소명을 더욱 굳건히 했으며, 1978년부터 교양영어과정부를 맡아 학생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봉사했다.
1980년대부터 그는 공동체의 여러 책임을 맡았다. 예수회 부수련장(1986), 교육감(1985–1989), 지구장보(1985–1986), 말씀의집 부원장(1987–1989) 등, 한국 예수회 초기 공동체의 기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에는 양성담당(1993–1994), 부관구장(1994–2005)으로서 후배 사제들의 성장과 형성을 위해 헌신했고,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아루페 공동체 원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그의 지도 아래 많은 젊은 사제와 수사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도직의 길을 걸어갔다.
(2005년 부관구장으로 일하는 모습)
민 신부는 단지 현장의 사목자이자 교육자일 뿐 아니라 예수회 한국관구의 고문서실 담당으로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2002년부터 선종하기까지 문서와 자료를 정리하며 한국 예수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역사를 단순히 보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공동체의 뿌리와 기억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한편 1978년부터 1983년까지 그는 정일우 신부와 함께 ‘복음자리’ 운동에 참여했다. 철거민과 도시 빈민을 위해 함께 살고 일하며 복음을 삶으로 나누었던 시간이었다. 이 경험은 그의 사제직에 깊은 영적 자취를 남겼다.
2018년 11월 24일, 민기식 신부는 휴가차 고향을 방문하던 중 미국 위스콘신주 여동생의 집에서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미국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된 후 유골은 한국으로 옮겨져 12월 11일 예수회 센터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다. 그의 장례미사에는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한 동료, 제자, 교직원, 그리고 친구들이 함께했다. 그는 용인 예수회 묘역에 묻혔다.
민기식 신부는 교육자로서, 공동체의 봉사자로서, 또 예수회의 역사를 지킨 사람으로서 조용하지만 강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화려한 언변보다 성실한 삶으로, 앞서기보다 곁에서 동행하는 태도로,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빛으로 남아 한국 예수회의 역사를 이끌어온 한 시대의 증인이 되었다. 민기식 신부의 헌신과 특유의 유머, 그리고 겸손한 삶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