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 박홍, S.J.
(박홍 루카 신부)
2019.11.09

박홍 신부는 1941년 2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천초등학교와 영천중학교, 서울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
젊은 시절 군 복무(1962–1964)를 마친 그는 1965년 9월 1일 예수회에 입회, 1967년 첫 서원을 통해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광주 대건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1970년 11월 6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직후 박홍 신부는 서강대학교에서 영성신학 강의를 시작하며 교단에 섰다(1970–2003). 1970년대 초, 그는 전국 천주교 대학생 및 지성인 지도신부(CCK)로 활동하며 교목 사목과 지성인 사도직에 열정을 쏟았다.
1971년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영성신학 석사 과정을 밟았고, 이어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학(1974–1979)하며 신학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1977년에는 미국 버클리에서 제3수련을 마친 뒤, 1979년 최종서원을 통해 예수회원으로서 수도회에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1980년 30일 피정 지도)
1989년 그는 서강대학교 제7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1997년까지 두 차례 총장직을 맡았다. 그는 취임 소감에서 “정의와 사랑으로 표현되는 복음 진리에 바탕한 인간 교육이 우리의 지향점”이라고 밝히며, 민주화와 학문적 성찰이 만나는 대학의 길을 제시했다.
1990년 당시 아직 정부 간 국교를 수립하지도 않았던 중국의 흑룡강대학과 자매결연을 맺는 등 국제 교류를 확대했고, 다산관·이냐시오관·서강빌딩 신축 등 캠퍼스 확충에도 앞장섰다. 동시에 그는 대학이 사회 문제에 응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공개협·통일 관련 단체 등 여러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5년에는 대통령 통일고문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교황청 사도좌 순시관(Apostolic Visitator)으로도 봉사했다.
총장직을 마친 후에도 그는 예수회와 교회 안에서 다양한 사도직을 이어갔다. 예수회 신학원장으로서 성소자 양성 프로그램을 체계화했고,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소장(1999–2003),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이사장(2003–2008)을 역임하며 교육과 영성, 행정과 신앙을 잇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평생 학생들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강의실에서 “수업 중 담배 피워도 된다”며 웃던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 시위로 연행된 제자들을 위해 “내가 신원을 보증하겠다”며 경찰서로 찾아가 풀어오기도 했던 신부였다.

박홍 신부는 2019년 11월 9일 오랜 지병으로 투병하다가 하느님 품에 안겼다. 많은 동문과 제자, 교직원, 동료 예수회원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Fr. 박홍, S.J.
(박홍 루카 신부)
2019.11.09
박홍 신부는 1941년 2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천초등학교와 영천중학교, 서울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
젊은 시절 군 복무(1962–1964)를 마친 그는 1965년 9월 1일 예수회에 입회, 1967년 첫 서원을 통해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광주 대건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1970년 11월 6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직후 박홍 신부는 서강대학교에서 영성신학 강의를 시작하며 교단에 섰다(1970–2003). 1970년대 초, 그는 전국 천주교 대학생 및 지성인 지도신부(CCK)로 활동하며 교목 사목과 지성인 사도직에 열정을 쏟았다.
1971년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영성신학 석사 과정을 밟았고, 이어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학(1974–1979)하며 신학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1977년에는 미국 버클리에서 제3수련을 마친 뒤, 1979년 최종서원을 통해 예수회원으로서 수도회에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1980년 30일 피정 지도)
1989년 그는 서강대학교 제7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1997년까지 두 차례 총장직을 맡았다. 그는 취임 소감에서 “정의와 사랑으로 표현되는 복음 진리에 바탕한 인간 교육이 우리의 지향점”이라고 밝히며, 민주화와 학문적 성찰이 만나는 대학의 길을 제시했다.
1990년 당시 아직 정부 간 국교를 수립하지도 않았던 중국의 흑룡강대학과 자매결연을 맺는 등 국제 교류를 확대했고, 다산관·이냐시오관·서강빌딩 신축 등 캠퍼스 확충에도 앞장섰다. 동시에 그는 대학이 사회 문제에 응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공개협·통일 관련 단체 등 여러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5년에는 대통령 통일고문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교황청 사도좌 순시관(Apostolic Visitator)으로도 봉사했다.
총장직을 마친 후에도 그는 예수회와 교회 안에서 다양한 사도직을 이어갔다. 예수회 신학원장으로서 성소자 양성 프로그램을 체계화했고,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소장(1999–2003),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이사장(2003–2008)을 역임하며 교육과 영성, 행정과 신앙을 잇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평생 학생들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강의실에서 “수업 중 담배 피워도 된다”며 웃던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 시위로 연행된 제자들을 위해 “내가 신원을 보증하겠다”며 경찰서로 찾아가 풀어오기도 했던 신부였다.
박홍 신부는 2019년 11월 9일 오랜 지병으로 투병하다가 하느님 품에 안겼다. 많은 동문과 제자, 교직원, 동료 예수회원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