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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포커스] 이근상 시몬 신부의 영신수련 에세이 6 - 나의 관상

2020.10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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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상

이근상 시몬 S.J.

 

나의 관상 사제 서품을 앞둔 피정이었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내며 한 말씀 해 달라고 매달렸다. 끼니를 굻어가며, 밤을 새고 기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더 깊게 빠져드는 수렁처럼 기도는 메마른 침묵이었다. 피정지도를 도와주시던 토마스 신부님은 ‘기도가 깊어질 수록 더 단순해지는 법이라’며 아무 것도 없는 그곳이 기도의 바른 자리라고 격려해주었다. 그의 말씀은 울림이 있었으나 한 마디 목소리가 간절했던 나는 신부님의 격려로 위로받지 못했다. 그렇게 속절없는 시간이 흐르고,10일 피정의 막바지 해질 무렵 웨일즈 센 바이노스 피정집 언덕받이에 있는 예수회원 공동묘지를 터덕터덕 걷고 있었다. 나란히 선 묘비석에는 아래 위 두 명의 이름이 생몰날짜와 함께 적혀 있었다. 땅에는 관 두개가 겹쳐져 있었다. 런던의 이층버스가 떠올랐다. 살아생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들이라면 오래 오래 난감하겠다는 객적은 생각에 히죽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방심한 순간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불쑥 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너무 급작스러웠다. 

 

‘지금 말해 주랴?’ 나는 이 난데없는 내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뭐든 한말씀 해 주십사 그토록 간청하였던 소망이 이루어질 찰나였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그리고 곧바로 서둘러 대답하였다. 마치 입을 막 벌리려는 이의 입을 급히 막으려는 듯. ‘아니요. 잠깐만요. 아직 아니에요.’  

 

이게 무슨 개떡같은 소린가? 그동안 한말씀만 해 주십사 청하였던 진지한 시간들은 뭐지? 도대체 나란 인간의 참말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내게 뭐라 해 버리면 오도가도 못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아프리카의 오지로 가라고 하시면 어찌할 것인가? 실은 그 해 내내 나는 장상에게 그런 곳으로 보내달라 청해왔었다. 내 청원들이 거짓이었나?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피정 내내 듣고자 한, 한 말씀은 ‘가라’라는 명료한 부르심이었다. 그런데 기다려온 바가 이루어지는 결정적 순간에 상대의 입을 막으며 서둘러 모든 문을 닫고 있다니. 황당한 자기분열적 상황에 나는 나로 인해 몹시 당황하였다. 듣고 싶지 않다는게 진짜 내 목소리였나? 내면의 나란 두려움에 가득찬 겁쟁이였단 말인가. 내내 말하고 청해왔던 건 도대체 뭐였지? 가지 말라는 말씀을 기다렸던가? 그만하면 되었으니 공부도 더 하고, 영성도 더 깊이 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사도직으로 파견받기를 원했던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서둘러 방에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강이 마음에 흐르고 있었다. 하나는 아주 작은 개울, 주님께서 내 목소리에 내내 귀기울여 오셨다는 내밀한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름. 보고 싶다고 외쳐놓고, 막상 보여주겠다는데 서둘러 눈을 감는 모순, 뭔가 복잡해 보였지만 사실은 극히 단순한 위선. 그건 시작을 알 수 없을만치 오래된 넓고 깊은, 묵은 강이었다. 서로 다른 별에 흐르는 두 개의 흐름처럼 접점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한 말씀 해 달라는 식의 기도를 할 수 없으란건 분명했다. 앞으로 내 기도는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소위 관상기도를 처음 배울 때부터 나는 이렇게 청했다. 무엇인가를 보여주신다면 있는 그대로 다 보겠습니다. 내용이 뭐가 되었든 하나 좀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정말이지 한말씀만 해 주시면 그걸 붙잡고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긴 말씀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냥 ‘야!’라는 외마디 말이면 족하다고 믿었다. 관상기도만이겠는가, 나는 주님으로부터 듣고픈 확인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이 숱한 청원들, 때론 절박하고, 때론 일상이 되어버린 나의 바람들은 대부분 대답이 없는 메아리처럼 외롭게 버티다 사라졌다. 절실함이 부족하여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나는 자주 비감한 감정에 빠지기도 하였다. 불모의 대화를 이해해 보려 낑낑거렸다. 답을 듣지 못하는 내가 놀이에 초대받지 못하는 외톨이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다가 듣게 된 내면의 소리란게 알고 보니 내내 듣고 싶지 않았다라는 명료한 원의였다니. 질끈 감은 눈. 나는 내내 눈과 귀를 꽁꽁 막아 온 것이다.  

 

내 기도는 그로부터 십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깜깜하다. 막아온 손을 치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건 방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도의 깜깜함이 지금의 나를 가장 나답게 드러내는 현실이란 건 배웠다. 아무 소리도 없는 침묵 안에서, 나는 자기 귀를 막고 있는 내 손가락의 압력을 감지한다. 깜깜함 속에서 스스로 눈을 가린 내 손바닥의 두려움을 감지한다. 보여달라거나 들려달라고 청하지는 않는다. 그건 거짓된 청이다. 필요했다면 강제력을 쓰셨을터. 침묵과 어둠 안에서 아직 눈과 귀를 열지 못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현존을 믿는다. 내 꽉 막힌 귀와 꽉 덮인 눈 넘어에 계신 그 분이 나의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내 눈에서 손바닥이, 내 귀에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를 기도한다. 가끔 나는 서서히 손을 치워볼까? 이제 눈을 뜰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막은 귀를 뚫고도 흘러드는 소리들, 귓가를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들, 소음들, 감긴 눈 위로 아른거리는 강한 빛의 움직임을 감지하곤 한다.  

 

내 관상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시간을 좀 더 가지라며 입을 다물고 계신 주님의 마음을 감지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육신의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보고 들어야 할 것도 같다. 나는 아직 시퍼런 두려움에 사력을 다해 힘을 주며 눈과 귀를 막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힘이 빠질 것이고, 어느 순간 방심하여 피식 웃는 날이 다가올 터인데, 바로 그 때에는 소리가 들리고 뭐가 보일지도 모른다. 이제 알려줄까라고 말을 건네오실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그날이 오면 그 때는 용기를 내서 예, 한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감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보고싶고 듣고 싶은 것들은 다 흩어져 사라지고, 내 대답해야 할 바만이 남아서 오롯이 당신만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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