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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이진현 라파엘 신부의 애덕의 교회사 4 - 위로와 치유의 사명 "예수의 기적"

2020.08
0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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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치유의 사명
애덕의 교회사 4. 예수의 기적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야 40,1).
위로를 받는 것은 쉽지만 위로를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 하느님 사랑으로 위로받을 수 없는 상처란 없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위로하시고, 언제나 희망하시며, 언제나 죄를 잊어버리시고,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 예수님을 찾아나서 그 분 사랑을 전하며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것, 그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자 우리 삶의 방식(Our way of proceeding)입니다. [...] 위로가 필요한 상처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에 상처들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성직자들이 상처를 줍니다. 성직 권위주의가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더이상 하느님 백성을 혼내지 마세요! 하느님 백성을 위로하세요! 부디 제대에만 붙어있는 성직자로 멈춰있지 말고 움직이는 사목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이 고백소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결코 용서하는데 지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부디 자비를 베푸십시오!
- 프란치스코 교황, <예수회 한국관구 회원들과의 만남> (2014,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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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공생활 초기에 갈릴레아 시골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셨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농부들, 목자들, 영세업자들이었다. 예수는 이들 가운데 아픈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억눌린 이들을 풀어주고 소외되고 멸시받던 이들의 존엄성을 높여주었다. 3년 동안 예수님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몸소 걸어다니며 사람들에게 당신의 열정과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의 하느님을 알려주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며 자신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으시는 아빠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다. 치유받은 사람들은 마귀가 지배하는 고통과 어둠의 세계에서 해방되었고 많은 이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0,38).

복음서에 따르면 참스승이신 예수님은 육체적, 영적인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겨 수많은 치유를 행하신다. 그분의 연민은 인간을 향한 '아빠' 하느님의 깊은 자비심에서 우러나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떼" 같아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에게 하늘의 아버지에 대해 들려주면서 이스라엘의 야훼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고 자비로우신 분임을 알려준다. 그분의 말씀을 들은 이들에게는 어떤 점이 분명하게 다가왔을까? 예수님은 풍문이나 고정관념이나 공허한 형식을 반복해서 말하지도 않았다. 그 분은 당신이 몸소 체험한 삶의 방식과 온유함으로 복음의 기쁨을 보여주었다. 그분의 치유로 그들은 보살핌을 받고 고통이 덜어졌다. 그분의 위로로 그들의 영혼이 평안해지고 그들의 삶이 회복되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달았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치유와 위로를 얻었다. 그 실상은 그 분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했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루카 7.2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두 가지 상호 보완적인 목표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곧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동시에 연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이다(마태 4,23 참고). 이런 방식으로 그 분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이미 당신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과 표징들(이적과 치유)로 효과적으로 선포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파견한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이 '파견받음'은 수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왔고 지금도 실천하는 핵심 사명이다. 그 사명이란 하느님의 위대함을 선포하고, 동시에 불행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가까이 가서 그들의 행복과 치유를 추구하며, 종종 분열되고 절망적인 사회를 개선하는 데 협력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가까이 계심은 당신의 창조 활동 속에서 온갖 종류의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유익한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어떤 방식으로든 늘 자연과 인간 안에 존재한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기적들이 얼마나 풍성하게 존재하는지 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들을 분별하고 향유하는 것은 우리 실존에서 최고의 기쁨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본성과 생명 안에 깃든 창조주의 섭리, 곧 광범위하고 창의적이며 관대한 당신의 현존에 경의를 표한다. 

에제키엘의 절망과 희망을 보자. 그는 자신이 몸소 겪은 좌절을 이렇게 표출한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에제 37,11). 하지만 잠시 후 하느님의 자애 가득한 결정을 깨닫게 된 순간 이 예언자는 곧바로 자신의 절망을 감사와 미래를 위한 계획으로 바꾼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12). 

이 희망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것이지만, 하느님은 항상 인간 실존을 통해 당신의 은사를 퍼뜨리시고 당신이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신다. 이처럼 자신이 직접 하느님의 계획에 협력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다양한 수도회들이 설립되었는데 대부분 그 이름에 '섭리'(Providence)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들은 고아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정성을 쏟았는데, 무엇보다도 이들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자신들의 활동이 곧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기적은 사람들간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 매일매일 인류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생겨난다. 진정한 인간의 모험은 진실한 사랑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에 있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의 능력을 발견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를 둘러싼 크나큰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협소한 사랑과 한정된 지평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빈곤하게 만든다. 사실 그 큰 사랑은 언제나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움직여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든다.

고대로부터 다채롭게 표현된 인간의 사유와 예술과 종교는 세상을 신의 눈부신 현현이자 그분의 전능함으로 빚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겼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우리를 알고 계시고, 창조된 모든 것은 항상 우리 존재와 관계가 있고 그에 따라 규정된다. 그러나 세상은 늘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애만 드러내지 않는다. 그 분은 알고 계셨다. 어떤 이들은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거역하겠지만, 다른 이들은 사랑할 수 있는 첫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할 것이고 다시는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몇 차례 대격변으로 별들이 찬란함을 누릴 것이며, 시간의 끝에 창조의 마지막 영광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모여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종말에 모든 창조 영역이 다시 창조주께로 돌아갈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역사의 여정에서 매순간 하느님이 온누리에 전파하는 기적들을 마주하고 직면한다. 이것들은 탐구하고 해독하고 이해해야 할 표징들이다. 더 겸손하고 더 정직하고 더 순수한 어떤 영혼들은 이 표징들을 알아내어 쉽게 옮기고 알려주는 사명을 수행해 왔다. 성경의 시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시편 19,2). 

토마스 첼라노(Tommaso da Celano, 1185-1260)가 쓴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는 이렇게 묘사한다. "성인에게 꽃들이 선사한 아름다움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그는 꽃들의 자태에  경탄하고 그 섬세한 향기에 취했다네.  [...] 성인은 꽃무리를 보면 마치 꽃들에게 이성이 있는 것인 양 설교하며 주님을 찬미하고 경배하도록 초대하였다. 똑같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는 잡곡밭과 포도밭, 돌밭과 숲, 아름다운 들판, 흐르는 샘물, 푸른 동산, 땅과 불, 공기와 바람에게도 주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도록  초대하였다."* 

토마스 첼라노 저, 프란치스꼬회 한국관구 역,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왜관 분도출판사, 2002년), 제1생애(회심 이전)
Tommaso da Celano, Vita prima di san Francesco,  80 F. 460. 

<피조물의 찬미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탄성을 새롭게 노래한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주님, 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모든 축복이 당신께 있나이다.  오로지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 이들 모두 속하오니 어느 누가 당신 이름 함부로 부르겠나이까." 오늘날에도 10월 초에는 자연이 우리를 위해 계절마다 끊임없이 선사하는 양식이란 기적에 감사를 드리며 들판의 결실들을 교회에 봉헌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날마다 기념하는 성체성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특별한 예식으로 그리스도를 기억하하며 바치는 감사기도로 구성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아버지가 되어 주심에 감사드릴 때, 동시에 모든 형제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되며, 그 순간 인류는 더 결속되어 연대를 이룬다.

위대한 성인들의 생애를 보면 그들이 예수의 기적을 재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인들의 넘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그들이 행한 기적들을 통해, 그리고 평화와 연대를 이루는 그들의 능력을 통해 생생하고 결정적인 주님의 현존을 마주하게 된다. 성인들은 단 하나의 우주만이 존재하며 인류를 포함한 그 진화과정이 언제나 하느님께로 향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보다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행동 원칙으로 삼았는데, 무엇보다 가장 고통받고 가장 궁핍하고 가장 외로운 사람들을 향한 봉사가 최우선이었다.
 
신자들은 대개 기적을 섭리와 연관시키곤 하는데, 그 섭리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고 우리의 불신을 용서하신다는 확신, 언제나 우리 삶 곁에서 우리의 여정을 지켜보시며 보호하신다는 신뢰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모든 것을 나누어 주셨다. 당신은 처음에 요셉과 마리아를 비롯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종종 이해하지 못했던 열두 사도들과 함께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몸을 나누어 주셨고 지금도 성체성사 때마다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로마 병정들은 그 분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그 분은 우리를 단죄하거나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를 싸매고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분처럼 행한다면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재현할 수 있는 기적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선한 이들에게도 악한 이들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리게 하시고 연약한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돌본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더 많이 돌보신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신뢰로 하느님께로 향하며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걱정하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다. 예수님이 거듭 말씀하시거니와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새겨 두셨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연 법칙과 인간 자유의지의 원천이 하느님의 자유임을 알게 된다. 곧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보살피고 지켜주며, 지지하고 인도한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최근 수십년간 앙리 고뎅, 앙드레 데피에르, 아베 피에르(Henri Godin, André Depierre, l'abbé Pierre) 등 여러 사제들로 하여금 교회의 문을 열고 나와 가난한 이들의 세상으로 투신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들의 헌신은 사상이나 이념보다 영적인 흐름과 마음의 지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빵과 정의, 그리고 가장 멸시받는 이들과 가족을 위한 투쟁이었다. 아베 피에르(Abbé Pierre) 신부는 다른 모든 것을 잃어 버렸을 때 가족만이 유일한 피난처라고 얘기했다. 오로지 상실을 겪을 때에만 누가 자신을 환대하는 지, 누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지를 알게 된다. 진정으로 믿는 이들은 기꺼이 온생애를 봉헌한다. 그들은 아무런 소유도 아무런 권력도 없이 스스로를 내던져 비참하게 억눌린 이들을 위해 싸운다.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타인들을 사랑하고 베풀도록 이끈다. 

"나의 성실과 자애가 그와 함께 있어 나의 이름으로 그의 뿔이 쳐들리리라. 내가 그의 손을 바다 위에, 그의 팔을 강 위에 놓으리라. 그는 나를 불러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이십니다.’ 하리라. 
(시편 89,25 ~ 27).

* 주요 참고 문헌: 후안 마리아 라보아, “그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라 – 애덕의 교회사”
 
Juan Maria Laboa, Por sus frutos los conoceréis: Historia de la caridad en la Ig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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