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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이진현 라파엘 신부의 애덕의 교회사 3 - 예수의 비유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구나"

2020.04
29

본문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구나"- 예수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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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 불안한 유대 지식인은 자신이 고민하던 질문에 대답해 줄 스승을 알아보게 된다. 예수는 그에게 놀랍게도 새로운 마음으로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라고 이르신다(요한 3,3 참조). 예수님은 그가 조상들처럼 닫히고 완고한 태도로 막혀 있기보다 주님께 계속 열려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신다.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시편 95, 8). 같은 태도로 사무엘 예언자는 어린 사울에게 "주님의 영이 당신에게 들이닥쳐, 당신도 딴사람으로 바뀔 것"(사무엘 10.6)이라고 알려준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께 간청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제자들은 구원하고 쇄신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이기심과 죄에 시달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청중의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드는 이야기로 우리가 깨끗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기를 바라신다당신은 비유를 통해 관대함과 사랑과 자비에 감화된 인물들을 제시하신다이런 의미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진실하고 적절한 비유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돌처럼 단단한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으면우리의 의향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욕망이 정화되지 않으면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도, 하느님 아버지를 믿을 수도 없다한마디로, 우리가 너그럽고 뚜렷하게 기꺼이 받아들이는 정신으로 새로 태어기 위해 변화하고 회심하고자 애쓰지 않는다면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요청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이 의도한 사랑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불순하고 열등하다고 멸시했던 사마리아인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예리고로 가던 중 강도들의 폭행으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전에 사제와 레위인은 그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passed by on the other side). 그들에게는 쓰러진 이가 당장 달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고 구조해야 할 그 사람(person)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피해서 지나쳐야 할 그것(object)에 불과했다. "쓰러진 그"를 인격체가 아니라 사물로 취급해 버린 것이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고(came near him), 옷이 벗겨진 채 초주검이 되어 방치된 '한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moved with pity, com-passion). 여기서 '가엾은'에 해당하는 희랍어 원어splackna "애가 끊어지는애가 타는, 애끓는"이란 뜻을 갖고 있다. 원단어의 발음 자체가 "스플락크나"로 목이 매이고 장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수님께서 측은해하셨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가엾음, 측은함이란 "당신의 아픔이 나를 애끓게 한다"는 것, 그의 아픔 때문에 내가 아파서 못 견딜 정도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아픔"을 해소하려는 이기적인 동기에서라도 어떻게든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것, 이것이 곧 연민이요 애덕 실천의 추동력이다.

 

사마리아인은 처음 보는 낯선 타인에게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간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4–35).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 이웃은 우리 각자로 하여금 해야 할 행동을 하도록 기회를 선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준다. 낯선 타자가 가까이 다가옴으로써 '이웃'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놓치기 쉬운 또 하나 핵심은 처음과 끝 질문에 있다처음에 율법교사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들려주고나서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라고 되묻는다나에게 좋은 이웃이 누구인지 찾기 전에 "내가 먼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낯선 타자를 형제처럼 대하고 돌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이웃 사랑의 모범을 제시한다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최초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면서 복음을 가르치셨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0,38). 그분의 제자들은 스승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고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이 예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사하는 교훈은 이것이다

 

"참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모두가 형제이며 모두가 서로 관심을 갖고 도우며 보살펴야 한다."

 

이어지는 역사는 줄곧 관대함과 이기심, 죄와 은총의 이야기로 전개되었는데, 수세기에 걸쳐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타인들의 고통와 슬픔을 걱정하는 사마리아인으로 회심한 사연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율법의 충만함을 하느님과 이웃 사랑 안에서 확인한 신자들이다. 각 시대마다 낯선 타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랑과 헌신의 행위들로 수많은 찬란한 이름들이 새겨졌다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창의력, 선행과 희생으로 지구상의 수많은 가난과 불의가 정화되고 순화되었다. 그 기억은 오직 하느님의 선하심 안에서만 지속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대개 유명인, 정치인, 지식인, 교황, 성인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하지만 세계는 셀 수 없이 많은 낯선 타인들과 이름 모를 민초들 덕분에 진보해왔다. 그들은 겸손하고 조용한 헌신으로 종종 어렵고 굶주린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켰다. 이처럼 거룩한 이들이 펼쳐왔던, 또한 가려졌던 무제한의 선은 설명할 수 없지만 인류를 재생시키고 쇄신시키는 원동력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그 의미를 단순하게 이해하고 그 기쁨을 음미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그 때 백성들은 그 분의 선포를 자신의 삶을 밝혀주고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는 기쁜 소식으로 들었다. "까마귀들을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골방도 곳간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너희가 이처럼 지극히 작은 일도 할 수 없는데, 어찌 다른 것들을 걱정하느냐그리고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루카 12,24-28).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9-31) 이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이면서 은유적인 이미지들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애와 관심을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분의 자애는 폭력, 이기심, 죽음의 지배에 맞선 사랑과 생명의 온유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가까이 계시는 선하신 분으로 신뢰했다. 매일의 전례를 통해 성부의 자애를, 계절의 기후 변화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재난 속에서 그분의 도우심을, 연약함 속에서 그분의 보살핌을 인식했다그들은 하느님께 메마른 때에 비를, 역병이 퍼질 때 보호를, 재난 때에 위로를 청했다. 신자들은 일상의 체험 너머 언젠가 하느님께서 악과 불의와 죽음을 끝장내실 것이라고 믿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덕분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의 용서를 청하고 이웃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며, 서로의 존엄성을 드높일 수 있도록 각자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겠다고 다짐했다.

 

예수의 비유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가까이 왔음을 확신하고 친숙해지도록 이끌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가까이 계시고 자애로우시며, 연민 가득한 응급구조사로 우리의 크고 작은 잘못들을 잊어주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하느님께 당신 자녀들을 더 가까이 인도하는 이러한 과정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의 표상인 잃었던 아들의 비유, 또는 더 나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에서 정점에 이른다. 예수님은 언제나 희망하시고,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며, 어떤 이유에서건 단죄하지 않으시고, 아들이 회개하여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다. 이 하느님은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신 당신 자녀들을 조건없이 사랑하시며, 그들의 한계를 아시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모두의 아버지이신 이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로서 서로가 형제 자매로서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는지 목격하고서 놀라워했다. 그들의 사랑은 스승의 계명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의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선포하는 기쁜 소식의 핵심은 하느님이 그들 모두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반석과 구원이라는 점에 있었다.

 

성 암브로시오는 누이 마르첼리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르는 장면과 바리사이 시몬의 불평, 그리고 예수님이 시몬에게 하신 말씀(루카 7,36-50)에 대하여 설명한다. “머리는 몸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기름을 바르면 좋은 냄새가 난다. 머리카락은 머리를 장식하지만 기름을 바르지 않으면 무겁게 된다. 재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면 무거워진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향기를 얻지 못하면 무겁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상처와 얼룩을 닦아주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발을 닦는 것이다.” 또 다른 저술에서 암브로시오는 이교 숭배 제사장들을 지원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를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것은 교회가 이어받은 유산입니다.  적대자들로 인해 오히려 이 교회 유산은 얼마나 많은 포로들을 성전수입으로 구출했는지, 굶주린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지, 쫓겨난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구호품을 보냈는지 말해줍니다. 암브로시오의 글은 참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항상 수행했던 고대교회의 자선 구호활동을 증언한다.

 

참고 문헌 

Dolores Aleixandre, Un tesoro escondido. Las parabolas de Jesùs [숨겨진 보물. 예수의 비유], CCS, Madrid 2011; 

José Antonio Pagola, Gesù. Un approccio storico [예수 역사적 접근], Boria, Roma 2009; 

Joseph Ratzinger (베네딕토 16 ), Il messaggio delle parabole, in Gesù di Nazaret [나자렛 예수, 7.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 Rizzoli, Milano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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