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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이진현 라파엘 신부의 애덕의 교회사 2 - 성부의 자애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

2020.02
27

본문

애덕의 교회사 1

하느님의 아버지되심” – 성부의 자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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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애덕의 교회사를 시작하며

1 성부의 자애

2 예수의 비유

 

사랑은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의 육화와 물질의 창조,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과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을 이룬다.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지혜를 더하거나 교의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고 설명한다. 우리가 이 장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신약과 구약 모두 인류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를 간직한 보고라는 확신 때문이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성경의 저자이자 진정한 주인공이다. 우리는 이런 문학 장르를 자서전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늘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과 놀라운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창조하셨으며, 사랑으로 그들로 하여금 당신과 불가분의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요청하셨으며, 사랑으로 끊임없이 우리 역사에 관여해 오셨다. 실제로 인류 역사는 줄곧 이어져온 이 만남을 수천가지 방식으로 꼼꼼하게 설명한다. 주도권은 늘 하느님께 있었고 형언할 수 없는 그분의 자애가 우리를 압도했다. 신명기는 이렇게 증언한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 주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참고, 신명기 7,7-8).*

 

* 성경 인용은 일반적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의성경"을 따르되, 문맥상 적절한 의미 전달을 위해 수정하는 경우 괄호 안 성경 장절 번호 앞에 '참고'를 표기한다.)

 

이 사랑은 거저 받는 것으로, 우리의 공로나 주장이나 기도에 따른 것이 아니다. 주도권은 늘 하느님에게 있다.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우리를 만드셨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선인들과 악인들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고, 우리의 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곤경을 도와 주신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이사야 예언자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한계를 존중하신다.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메마른 곳에 시냇물을 부어 주리라. 너희 후손들에게 나의 영을,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부어 주리라." (이사야 44,3). 이 신성한 사랑은 생명체를 소생시키고 재생시키며, 다시 세우고 심고 정화시키는 정신으로 피조물에 부어진다 (참고, 에제키엘 35장과 36).

 

이스라엘 백성은 매순간 돌보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다. 성경에서는 누군가를 일컬을 때 "하느님이 기억하는 사람,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의 사람" 등으로 부르며 사람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당신께서 직접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피조물은 당신 자신마저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시는, 이런 하느님께 응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응답을 통해서만 그 분 사랑의 충만함과 그 의미와 행복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피조물은 그분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대교황은사랑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오직 사랑만이 영혼을 하느님과 결합시키고 일치시킨다고 썼다. 순수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은 새로이 거듭났다고 깨달은 순간 하느님을 알아차리고 사랑했으며, 아가서처럼 노래를 부르며 그분의 사랑을 향유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아가 3,4).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참고, 에페 3,17-19). 이런 이유로 첫째 가는 계명은 우리가 감사의 응답을 할 때,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온 마음을 다하고, 온 목숨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참조, 마태 22,37)이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삶과 가정의 소박한 기쁨같은 행복과 평온 속에서, 그리고 외딴 마을과 수도원의 고독 속에서, 심지어 질병과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네."(시편 145.9).

 

십자가 없는 교회란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성사를 매일 기념하지 않는 교회도 있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셨다."(요한 3,16). 당신 외아들을 내어 주심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교의로 당신 자녀들을 향한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의 약속을 이룬다. 그리스도교만의 독특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약함, 이 형언할 수 없고 신비한 사랑이 초래한 십자가 위 성자의 희생에 관한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 약함, 불확실, 불안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정화하고 위로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시간은 영원하며, 어린이에게 아버지의 사랑은 나침반이자 든든한 성채이며, 성인에게는 자신을 지지하고 균형을 맞춰주는 저울이다.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참된 지침, 삶의 심오한 의미, 존재의 필수 지평이다.

 

우리를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여러 종교들의 다양한 양식과 교리 및 의례를 통해 표현되는데, 그리스도교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알아볼 때 형제애, 관대한 희생, 희망과 기쁨을 나누는 종교로 그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구약에서는 "내 마음의 반석", "내 기쁨, 내 생명, 내 찬양, 내 희망의 하느님"(참고, 시편 73,26; 43,4; 42,9; 109,1; 39,8) 등으로 나타나며, 신약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벗이자 연민 가득한 이, 이웃이며 자비롭고 온유한 분으로 나오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개인적인 관심과 우정과 친분의 의미로 벗이라고 부르신다. 이처럼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에는, 하느님께서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대하시는 관계가 성립되고, 예수님이 우리 모두가 형제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의미가 확실해진다. 창조의 시작과 원천은 창조주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창조주의 이 광대한 사랑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온 존재와 모든 관계를 표시하고 결정하고 구성하는 본질적 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다.

 

죄는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수 없음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법이며 정의는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의로워진다. 율법으로 단죄된 간음은 사랑으로 용서 받았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가지도 않으면서, 즉 사랑의 실천도 없이 율법을 강요하려고 했다.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용서와 화해로 사건을 해결하신다. 실제로 한 가지 확인되는 것은 법으로 강요하는 의무가 되기 전에 자비행처럼 각자가 스스로 기꺼이 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자신의 운명을 공유하며 상대방에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편지에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쓴다. 인류 역사 전체는 사랑과 사랑의 결핍, 은총과 죄로 감히 요약할 수 있다. 이 여정에서는 성부의 자녀됨을 자각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동반자를 만나지 못하고 오류에 빠져 새로운 카인처럼 세상을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인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 "모든 오류의 가능성은 미워하는 사람 안에 있다"고 썼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도 요한의 확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 공동체들이 달라졌을 것이며 우리의 관계가 다른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점은 사랑 실천의 역사(history of caritas)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앙과 형제애적 삶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누룩과 반죽이 되어 아픔을 덜어주고 상처를 싸매는 치유로 정화와 평화를 선사하는 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해왔다. 이 치유의 사도직이야말로 역사상 그리스도교 사랑의 실천으로 선호되었고 또한 돋보였던 분야이다. 자비와 보호는 우리가 하느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과 친밀함은 형제 자매들에게 청하는 것이다.

 

"아버지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예수님이 감사하다고 말씀하신신 이유는 어린이도 알만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며 철부지도 쉽게 알 수 있다는 하느님은 가족과 우애, 사랑, 관대함과 섬김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몸소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며, 우리 일상의 삶 한가운데 이웃들의 익숙한 체험 속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달리 말해서 아무리 학식이 넘치고 영성이 깊더라도 이런 방식이 아니면 하느님을 못 알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가 늘 생명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전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역사의 주인은 결국 그 분이시고 마지막 때에 그 분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그 동안은 우리가 주인공으로서 인류의 삶을 창조하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 현존의 신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지 여부 또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 은총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인간들의 실존과 그들의 삶을 조명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와 구원자의 사랑을 구현할 도구이자 증인이 될 막중한 책임을 가진다. 반대로 그들이 이 사랑에 장애물이 되어 소외의 원인으로 변질된다면 심각한 타락을 초래할 것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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