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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넷째주간] 이진현 라파엘 신부의 애덕의 교회사 1 - 시작의 글

2020.01
2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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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의 교회사> 연재를 시작하며

 

“애덕이가 누구예요?” 

한 청년 지인에게 책 제목으로 “애덕의 역사”가 어떻게 들리냐고 물었더니 “애덕이가 누구냐?”고 반문한다. 옛날 할머니 이름 같단다. “아차! 이 젊은 친구에게는 ‘애덕(愛德)’이란 한자어가 낯설게 들리는구나!” 그래서 “향주 삼덕의 하나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이른다”고 설명해주니, “향주는 또 뭐냐? 술 이름이냐?”고 묻는다. 말장난 치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세 가지 덕성(신덕, 망덕, 애덕)이라 얘기하니까, 또 나머지 단어 뜻을 어려워한다. 곧바로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한다고 대답해주니 그제야 끄덕한다. 옛 교리문답에 담긴 용어들이 대부분 한자여서 어르신 신자들에게나 익숙하지, 한글 위주의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는 이런 단어들이 생소하겠구나 수긍이 갔다. 이밖에도 여러 지인들이 “그리스도교 자선의 역사, 애긍의 역사, 구휼의 역사, 긍휼의 역사, 자비의 역사, 선행의 역사, 사랑의 역사, 카리타스의 역사, 그리스도교 사랑 실천의 역사…” 등등 각양각색의 제목들을 추천해주었다. 최종적으로 촌스런 이름처럼 들리는 ‘애덕’이란 낯섬이 오히려 주목을 끌 수 있겠다 싶어 ‘애덕의 교회사’를 연재 제목으로 정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5,20) 

믿으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데, 신앙의 열매는 애덕 실천이라는데, 이것이 예수님 삶과 죽음, 부활의 핵심 메시지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는데, 놀랍게도 사랑 실천의 발자취, 그 역사를 서술한 책이 없다! 그 사실들은 분명 넘치도록 많을텐데 이에 대해 서술한 교회사 책이 드물다. 개별 성인들의 놀라운 성덕과 위대한 업적, 신기한 기적 이야기로 흩어져 있을 뿐,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그 실천에 관해 한 묶음으로 일관된 입장으로 서술한 책이 없다! 교의사, 영성사는 있는데, 애덕의 역사, 자비행의 역사가 없다! 여태껏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타인들을 사랑해왔던 사실들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았다. 교황들의 성덕 혹은 죄악들, 성인들의 이적과 순교, 교회 제도와 기관의 흥망성쇠, 교회 안팎의 세력간 경쟁과 갈등에는 과도한 흥미를 쏟는 반면,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공동체와 교회의 본질을 간과했다. 본격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사랑 실천의 역사는 서술된 적이 없다. 최근의 그리스도교 역사서들조차 교회의 공헌, 교회사에서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찾는 데는 인색하다. 오히려 교회의 ‘죄악과 어리석음’의 사실들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역사서들, 교황과 성직자 수도자들의 범죄를 샅샅이 캐내어 비난으로 채운 서적들이 넘쳐난다. 대중매체는 교회의 야사, 권력 암투, 사생활 추문에만 관심을 쏟으며 과장과 왜곡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사극 소재를 찾는다.  교회 비판과 반성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대중에게 비쳐지는 교회의 모습은 권력남용과 추행들, 침묵과 세속화, 미신적 열광 아니면 무관심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판한다”는 이들도 순수해보이지는 않는다. 교회가 조금이라도 실수나 잘못을 하면 이리떼처럼 달려들고 물어뜯어 큰소리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기존 신자들은 성직자 권위주의에 질려버리고 지식인들은 실망하다 못해 냉소주의로 교회를 비웃는다. 애정어린 관심으로 교회를 걱정하던 신자들도 지쳐 떠나간다. 청년들은 신앙에 대한 호기심조차 없다. 이제 약화를 넘어 해체의 때가 임박한 것인가?  지금의 교회는 난파선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역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이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십시오.” Vide, inquiunt, ut invicem se diligant. See, theysay, how they love one another.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호교론Apologeticum>, 39).  

 

이교인들은 경탄의 시선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 고유의 정체성은 사랑의 실천으로 증거하는 애덕caritas일 것이다. 이 사랑은 무엇이고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 정서와 행위는 역사 안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실현되었을까? 이들 질문에 바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꼼꼼하고 신중하게 차근차근 밟아야 하는 길고 느린 여정이다.  여기 “그리스도교 사랑 실천의 역사”를 다룬 책을 소개한다. 이 연재는 이 책을 중심으로 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후안 마리아 라보아, “그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라 – 애덕의 교회사” Juan MaríaLaboa, Por sus frutos los conoceréis: historiade la caridad en la Iglesia (San Pablo, 2011) 

이 책은 애덕caritas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호의, 사랑, 연민이란 가치가 어떻게 ‘교회’라는 몸의 동맥을 통해 활력 있게 그리고 유유히 흘러왔는지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살피고 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것들을 분석하고 역사의 다른 사건들과 관점들과의 연관성을 고찰한다. 저자는 그 열매가 교회사의 다채로운 모자이크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독창적인 역사관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 모두가 그 분 안에서 서로 형제이며, 형제로서 행동하고 증거해야 함을 알려주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 회개한다면 신성, 자연, 사회,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교회는 종교를 특징짓는 성전이나 희생제물, 계명이나 제도나 조직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즉 형제애와 연대가 두드러진 공동체를 더 근본에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에 따르면, 사랑 안에서 아버지요 아들이고 또한 성령이신 하느님은 자신의 온유함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아무런 구분없이 당신의 은총을 나눠 주심으로써 당신의 자애을  드러내신다. 사랑이란 단어는 교회의 삶과 설교에서 습관으로든 열정으로든, 적절하건 적절하지 않건 시도 때도 없이 언급된다. 모든 기도와 강론과 교회문헌들이 사랑에 대해 말하고 지겹도록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늘 제기되는 합리적인 의문점은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도 흔하게 쓰이지만 현실에서 그 행위 양상이 항상 이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신자들 사이에 애덕이 부족하다고 정죄하는 이단심문은 전혀 없었다. 역사상 애덕에 반하는 죄는 소죄의 의미만을 지닌다고 단정지은 적도 없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듯한 사례들에 대한 교회의 심사도 없었다. 신학과 교회사 서적 중 구체적인 사랑에 대한 서술은 너무 적으며, 비록 돌봄의 역할을 잊은 건 아니지만, 하느님 백성의 일상 여정에서 서로간의 호의와 사랑의 현존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부모 자식간 피붙이 사랑, 형제 자매들의 우애, 연인들의 감미로운 사랑, 이웃들 간의 우정 등을 언급하는 것은 명백히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고결하고 순수한 신적 사랑과 대비되는 세속적 애착으로 여겨져 일종의 ‘금기’처럼 외면당해 왔다. 신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정의는 형이상학적이고 천상적 의미로 주어지지만, 지상에서 인간의 사랑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 즉 시공간 역사의 여정에서 이웃 사랑이 어떻게 하느님 사랑과 연결되는지 제대로 설명한 저술이 드물다. 

 

사랑과 관련해 교회 전통에서 허용돼 왔던 가치는 가진 자들이 갖지 못한 이들에게 베푸는 시혜적 자선과 애긍이었고 그 베품을 받는 이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가난한 이들’을 수없이 외치지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 그들 각자 고유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자선을 행하는 이들의 선의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자선을 받는 이들을 얼굴 없는 익명의 존재들, 비인격화된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수직적 시선의 한계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동정과 자선에 그친다면, 나는 그들을 사랑했을 지 몰라도 그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온갖 종류의 고통을 겪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아무 죄 없는 이들의 고통을 보는 것이다. 제자들은 태생 맹인을 보자 예수님에게 물었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다른 논리로 과거가 아닌 미래의 시선으로 대답하신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2-3). 그 분은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고통에 맞서 싸우고, 고통의 결과를 완화시키며, 할 수 있는 한 고통을 없애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고 사랑하며, 당신께서 그리 하셨듯이 그들 고통의 십자가를 우리가 함께 짊어질 것을 초대하신다. 십자가야말로 약하고 순수하며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자 결정적인 만남의 순간이다. 

 

그리스도교 애덕의 양상이 언제나 모든 면에서 한결같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끊임없이 재생되는 죄와 은총, 이기심과 관대함, 경솔함과 열정이 담긴 항아리와 같다. 교회 조직은 비대하고 우리는 그것에 과도한 관심을 쏟는다. 하지만 교회의 주된 구성원은 위대한 성인, 탁월한 교황, 아주 박학다식한 신학자들이 아니라 신학을 거의 모르는 평범한 신자들이다. 이들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며 자신들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진정 의미하는 바를 가르쳐주고, 이웃들과 동반하며 성심성의껏 그들을 도와준다. 2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원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해질 무렵 잠들기 전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들의 슬픔과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예식을 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애정어린 인사를 나누고 애덕을 우선시하며 조금이나마 가진 것을 내어주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과 그들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들의 선한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이 평범한 신자들은 이웃을 향해 다가가는 사람들로, 아픈 이들, 버림받고 배척당한 이들, AIDS 환자, 곤경에 빠진 청년들, 온갖 처지의 가난한 이들, 외면당한 이들, 세상의 모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일한다. 이 모호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이야기들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면을 차지한다. 수도회들과 교회단체들, 위대한 사도직의 창설자들의 이름들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익명의 예수 추종자들로 이 러브스토리의 진정한 주인공들이다. 

 

이 여정에서는 교회사 연구의 일반적인 관점을 살짝 바꿔서 그리스도인들 서로가 가졌던 사랑과 연대, 연민 가득한 관심사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연재는 1차 사료에 기초한 비판적 연구가 아니라 기존 교회사 저술들에서 ‘애덕’이란 주제에 어울리는 인물들과 사건들을 골라서 ‘지금 여기’ 상황에 맞게 풀어낸 사목적 글쓰기임을 밝혀 둔다.  이 만리길의 여정을 조심스럽지만 우직한 소걸음으로 내딛고자 한다.

 

2020년 1월, 이진현 라파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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