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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사회정의 및 생태 사무국 SJES 50주년 기념 프란치스코 교황 메시지

2019.11
19

본문

예수회 사회정의 및 생태 사무국 SJES 50주년 기념 프란치스코 교황 메시지 (예수회 사회사도직 회원 및 협력자 알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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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예수회는 애초부터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이냐시오 성인이 1550년 예수회 기본법에 기록해놓은 소명입니다. 예수회원은 신앙을 수호하고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리에 있어서 영혼의 선익을 위하여전념해왔습니다. 또한 그 존엄성이 훼손된 이들을 화해시키고 감옥과 병원에 있는 이들을 자비로이 돕고 섬겼으며 다른 모든 애긍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는 단지 그럴 의도를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경험으로 해온 것이며 삶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위로로 채워주고 주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만난다는 느낌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원래의 이냐시오의 전통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루페 신부님은 이를 더욱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분의 성소의 밑바탕에는 인간의 고통과의 만남이라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이들, 울고 있는 이들, 삶에서 어떤 도움도 받을 길 없이 마치 난파당한 것 같은 이들에게 더욱 가까이 계신 것을 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 사회가 경멸한 이들에게 자발적으로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하려는 불타는 열정으로 나를 타오르게 합니다.” (아루페 신부님 자서전)


오늘날 우리는 내버려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는 내버리는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내버려지고 있습니다. 아루페 신부님의 이 글에서 저를 가장 깊이 감명시키는 것은 이것이 기도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루페 신부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하느님과 싸움을 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던 것입니다. 베드로 아루페 신부님은 늘 신앙의 봉사와 정의의 증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들은 급진적으로 연결된 것이지요. 그분에게 예수회의 모든 사명은 신앙을 선포하고 정의를 증진시키라는 도전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부 예수회원의 사도직이었던 것이 모든 이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매년 전례를 통해 우리는 순수한 어떤 배척된 아이의 모습으로 하느님에 대해 관상하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사람들에게 오셨고 배척받았습니다. (요한 1, 11) 이냐시오 성인에 따르면 안칠라 ancilla, 달리 말하면 봉사하는 젊은 여성이 성가정에 참여합니다 (영신수련 111, 114). 이냐시오는 그 하녀 곁에서 우리 역시 보잘것없는 부당한 종이 되어 그분들을 보고 또 찬찬히 살펴보며 마치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처럼 하도록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은 어떤 시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냐시오는 이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러한 것을 살았습니다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능동적인 관상, 배척받는 하느님에 대한 관상은 우리가 모든 주변으로 내쫓긴 이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 어떤 봉사와 섬김도 가난한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선의, 경험, 문화, 신앙생활 방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복음의 기쁨, 199). 가난한 이들 속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특권적인 장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삶에 주어진 소중한 선물입니다. 희생자들과 가난에 찌든 이들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것 말입니다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반영합니다. 이는 예수회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예수회가 가난한 이들과 만나고 그들을 경험할 때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강해집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라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단순하면서도 더욱 사랑이 넘치고, 더욱 온화하고 복음적인 신앙이 되었다.” (예수회 제34차 총회문헌, 교령2, 1)


여러분은 예수님의 형제들의 고통을 관상하면서 진실된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회심이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며 우리를 매일 그분과 함께 머물며 십자가에서 그분을 내리도록 초대받는 변화입니다취약한 이들과 이러한 유대를 맺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의 부서지고 분열된 세상에 여러분이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만나게 해야 하고 또 그럼으로써 우리 각자가 이 형제의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요, 그 어떤 말도 필요없이 우리의 돌봄과 연대 속에서 그분의 현존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이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마태 8, 20)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 4, 28). 오늘날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분의 성령이 이 시대에 십자가에 못박힌 이들을 섬기는 일에서 그분을 따르라고 우리를 움직이고 계십니다불의와 인간 고통으로 점철된 현재의 상황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세 번째 세계대전, 범죄와 싸우고 학살과 파괴와 싸우는 전쟁을 말입니다” (2014913일 레디푸랴 현충원 강론). 인신매매는 여전하고 외국인혐오의 발언은 넘쳐나고 국가이익의 이기적인 추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들 간의 불평등과 국가 안의 불평등은 치유는커녕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기하학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의 공동의 집을 지난 200년 동안 아프게 하고 잘못 다룬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53). “환경과 사회의 훼손이 특히 이 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찬미받으소서, 48)은 놀랍지도 않은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일련의 책무를 갖게 됩니다. 희생자들을 동반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들에게서 우리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관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너무나 많고 또 그들로서는 접근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또한 세상의 실재에 기반하여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악을 밝혀내야 하고 최선의 대답을 찾아야 하며 니콜라스 아돌포 총장님이 그토록 예수회에 원했던 사도적 창조성과 깊이depth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응답은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문화적 혁명” (찬미받으소서, 114)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시선, 우리의 태도, 우리 자신을 지각하는 방식, 세상 앞에 우리가 서는 방식을 변화시킬 문화적 혁명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종종 사회구조 안에 숨어 있는 사회적 질병들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는 파멸과 죽음으로 귀결되기가 싶습니다 (찬미받으소서, 59). 사회구조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일은 대중들이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은 바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201579, 볼리비아, 산타 크루즈 델라 시에라, 대중지도자와의 모임).

 

여러분들 일부와 여러분 앞서의 많은 예수회원들은 많은 영역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 교육, 난민 돌봄, 사회적 봉사와 애드보카시와 관련된 일들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창조적인 노력을 계속 하십시오. 더욱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항상 쇄신을 염두에 두십시오. 교회가 오늘날 우리가 우리 사도직에 대해서 하듯이 식별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여러분과 점차 더욱 세계화되는 세상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발언하는 다른 교회와 시민 조직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협력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지구를 둘러싼 세계화는 문화적인 정체성, 종교적인 정체성, 개인적인 정체성을 앗아버리며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버립니다. 참된 세계화는 다면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로 모으되 각자가 각각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우리 형제들과 위협받는 공동의 집의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신비를 관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1975년 이후 많은 동료 예수회원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금년 엘 살바도르의 중앙아메리카 대학교에서 순교한 예수회원들의 30주기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콜벤바흐 총장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주었고 그분은 예수회 전체에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관대하게 응답했습니다. 선교자들의 삶과 죽음은 우리 봉사가 마지막에 도달하는데 격려가 됩니다.


희망의 길을 열기

우리들의 세상은 변화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위협받는 생명을 보호하고 가장 약자들을 보호하는 변화를 말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고대하지만 많은 경우 그 변화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배제의 최전선에서 우리가 만약 인간의 논리에만 충실하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져버릴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일은 이 세상의 희생자들이 많은 경우 포기하려는 유혹에 져버리기보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음 사실의 증인입니다. “가장 미천하고 착취당하고 가난하고 배제된 이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가난한 이들이 조직화되면 그들은 진정한 사회적 시인, 일거리 창조자, 집 건축가, 음식 생산자가 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세계시장에 의해 배척된 것입니다” (201579, 볼리비아, 산타 크루즈 델라 시에라, 대중 지도자와의 모임).


사회사도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차를 세우고 희망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절차는 사람들과 공동체가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절차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깨달도록 해주고 능력을 사용하게 하며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도록 합니다.

여러분은 종말론적 나라를 찾고 언제나 역사를 만들어내는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희망”(복음의 기쁨, 181)을 위해 일합니다. 여러분의 희망을 격려받고 위로와 위안을 받고 다시 생명을 찾아야할 이들이 있는 곳에서 나누십시오. 모쪼록 미래를 열고 가능성을 끌어올리며 대안을 만들어내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도우십시오. 여러분은 매일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봐야 합니다. 사랑의 일꾼이자 희망의 씨뿌리는 이가 되도록 하십시오. 가난한 이들의 삶과 위협받는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싸우십시오. 웃고 울면서 걸아가십시오. 결코 희망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찬미받으소서, 244).


나는 아루페 신부님의 이야기로 나눔을 끝내고 싶습니다. 태국에서 아루페 신부님은 난민 캠프에서 모든 것이 빼앗긴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아루페 신부님은 연민의 사람이었고 이들과 함께 고통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루페 신부님은 한가지만을 당부했습니다. 기도를 멈추지 말라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뇌졸중이 그분을 덮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9-11-20 14:04:14 관구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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