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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셋째주간] 이근상 시몬 신부의 영신수련 에세이 1 - 기도와 침묵

2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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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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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침묵


누가 진짜 친구냐?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응답이 가능할텐데, 친구라 하면 말없이 같이 있을 수 있는 이가 아닐까. 진짜 깊은 고민들이란 말로 풀어 놓을 수가 없다. 자신의 치부를 누구에게라도 드러내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상처란 대부분 위태하고 여린 살갗이어서 덮어 놓은 환부를 열어 제치는 건 매우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을 때, 말이 있는 나라야 편이 되어줄 수 있다는 이들과 말이 없을 때 말이 없기에 더 가까이 다가와 말없음으로 한 편이 되어주는 이. 결국 남과 친구란 이 말 없음이라는 경계에서 갈리고는 한다.


기도 속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진지한 대화란 말로 다 풀어 헤쳐질 수 없다. 말은 그저 양념 같은 역할일 뿐, 본래 재료가 좋으면 양념은 덜 할수록 좋듯, 뭐든 빈자리 없이 끼워 넣는 건 추한 짓이다. 말은 줄이고, 마음이 커져야 한다. 그렇게 마음으로 서로의 곁에 자리를 내 주는 대화. 주님과 진짜배기 좋은 친구라면 우린 말없음으로 소통하는 날에 다다를 것이고 한번 그 맛을 본다면 말로 주절거려야할 가벼운 대화란 어릴 적 추억이 될 공산이 크다.


기도만이겠는가. 관계란 말로 붙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마주하여 서로에게 머물며 천천히 그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 클릭하면 새 장면이 쫙 펼쳐지는, 그렇게 펼쳐져야 하는, 속도가 생명인 세상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 느릿하고 답답한 말없음은 사실 모두에게 고향처럼 아늑하고 그립니다.


기도는 이 침묵, 같이 하는 침묵이 켜켜이 눈처럼 쌓이는 관계이리라 짐작한다. 언제든 찾아가 머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울 수도, 미소 지을 수 있는 내밀한 장소. 내 안에서 올라오는 소리든, 바깥에서 외치는 소리든, 소란이 방해할 수 없는, 거친 말은 뚫고 들어 올 수 없는 마음의 방공호.


기도를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라고 하는 가르침은 참으로 진리다. 기도로 우린 그 분의 현존을 감지하고, 동시에 우리의 현존을 그분께 알린다. 다만 말이 필요한 날. 어깨를 둘러줄 손길이 필요한 날. 당신과 우리 사이의 침묵이 아쉽고, 당신이 그저 멀리 있어 길을 잃은 날. 한 말씀 해주시기를 간청하는 그 날, 당신의 침묵은 여전히 말없음일까? 그 날에는 그 날의 소리가 있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다만 부서지고 무너진 마음만이 감지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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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1-12)


이제벨에게 쫓기던 엘리야가 들었던 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다고 한다. 히브리말 직역은 뜻을 알아챌 수 없는, 침묵의 작은 소리다. 어떤 우물거림. 그러나 그 보드라움, 그 작음에 깃들인 하느님이 감지되는 침묵. 하느님의 소리는 세상에 내 놓고 자랑할 무기가 아니라 그저 내 작은 얼굴을 가리고 주님임을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작고 여리다. 마치 내 곁에서 울고 있는 그 누군가의 신음처럼, 지나쳐온 숱한 이들의 힘겨운 일상이 내는 우물거리는 소리. 엄마가 부르는 내 이름. 조심스럽게 내 처분을 기다리던 작은이들의 소리. 침묵의 얼굴들. 듣고자 하는 이의 간절함에 응답하는 당신의 대화법은 말이 없고,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저 잠정적으로 침묵이라 이름 지을 뿐이다. 달리 어떤 말이 어울리랴.

 

[이근상, 영신수련 에세이,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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