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소식

[공지] [특별기획 1탄] 페드로 아루페 신부를 기억하는 추도의 글 (그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 피터 헤블스웨이트 (Peter Heb…

2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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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아루페 신부 선종(善終)에 따른 추도의 글 (1991년 2월 16)

글쓴이 : 피터 헤블스웨이트 (Peter Hebblethwaite, 전 예수회원기자이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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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아루페는 공의회 총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었다실제로 그는 1965년 예수회 총장으로 선출된 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넷째와 다섯째 세션에 참여했다페드로 아루페를 총장으로 선출한 제31차 총회 역시 특별했다제 31차 총회는 마치 예수회의 제2의 설립과도 같았다해산되었던 예수회가 1814년 재건되었을 때 해산 이전의 예수회와의 연속성을 주장할 수는 있었지만 몇몇 측면들은 예수회의 처음의 정신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되었다재건 이후 첫 번째 예수회 총장이었던 요한 루트한은 다소 경직된 방식으로 영신수련을 제시하였고 예수회원들 역시 교황지상주의의 경향을 띠었다. 진정한 예수회 전통이 재발견된 것은 1930년대스페인 예수회원들이 저널 만레사를그리고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저널 크리스투스를 발행하면서부터였다그리고 이어서 페드로 아루페가 일본에서 날아왔다.


이냐시오 성인과 놀랄 만큼 비슷한 바스크인이었던 페드로 아루페는 예수회를 다시 만들다시피 일했다아루페는 두 가지 흐름 안에서 예수회를 쇄신했다첫 번째 흐름은 공의회에서 요구한 교회의 쇄신이었고 두 번째는 수도회가 자신의 카리스마에 더욱 충실해지기를 바란 공의회의 요청이었다페드로 아루페는 이 두 흐름을 따르는데 있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1974년 11페드로 아루페는 왜 사람들이 예수회를 떠나고 있는가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그는 성소 감소의 원인을 현대 사회즉 세속화에 돌리지 않았고 비탄에 젖지도 않았다그는 '그들의 떠남은 슬픈 일이지만 비극은 아니고 축복의 안수를 주어야 할 일이라며 오히려 이러한 떠남을 통해 몇가지를 배웠다'고 말했다이는 그가 하느님을 섬기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성직자의 이탈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로마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페드로 아루페가 우려했던 것은 이러한 떠남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떠남이었다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이 교회와 수도회를 떠나는 것이야말로 변화 혹은 쇠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로 이해했다. 페드로 아루페는 분명하게 표현하였다젊은 예수회원들의 목소리는 수도회 안에 있는 현대 세계의 목소리입니다.” 


전임자였던 요한 밥티스트 얀센 총장이 주로 로마에 머물며 교황청의 목소리를 대변했다면아루페는 세계를 돌아다녔다그러면서 그는 영신수련에 의한 식별의 태도야말로 예수회원의 신원의 정수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또한 회헌은 영신수련의 빛 속에서 독해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강하게 주장했다그리하여 도처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광활한 피정 집들은 작은 규모의 공동체로 대체되었고 예수회원들은 총장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아루페에 대한 비판가들은 그가 예수회를 방치했다고 말하지만 실로 그렇지 않았다오히려 그는 전임자들보다 더욱 더 예수회를 지도하고자 했다다만 그의 통솔의 방식은 예수회원들을 신뢰하는 것이었다그는 결코 신뢰의 위험을 무릅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그리하여 예수회원들은 글쓰기와 신학연구사회활동 등에 있어 질서 잡힌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또한 페드로 아루페는 비난에 경청하는 십자가 역시 기꺼이 짊어졌다이는 고통스러운 십자가였다많은 주교들이 계속해서 아루페 신부를 찾아와 비난했다예수회원들이 게릴라에 가담하고 작업복을 입은 채 미사를 거행하고 회칙 인간생명 Humanae Vitae’을 비난하도록 가만두느냐고 말이다이에 대해 페드로 아루페는 그의 사람들을 끝까지 옹호하였다단지 그는 예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제발 내가 여러분을 보호하기 쉽게만 해주십시오.”


페드로 아루페는 바오로 6세 교황과 영적인 주파수가 아주 잘 맞으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의 관계는 전혀 다정한 것이 못되었다1979년 9월 21일 요한 바오로 2세는 베드로 아루페와 그의 자문들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최근 수도생활을 괴롭히고 있는 위기가 여러분 예수회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이는 그리스도 신자들과 교회고위성직자들과 교황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소.” 이에 대해서 페드로 아루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교황님의 요청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다 나은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우리는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실 교황은 예수회원들이 교회의 교도권에 더욱 충실하고 사제적 성격에 더욱 충실하기를 바랐다당시 교도권에의 충실성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생명을 분명하게 옹호하고 여성사제와 같은 까다로운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었다결국교황과 아루페의 갈등의 본질은 페드로 아루페가 진단한 교회의 상황이 교황청에서 행한 분석과는 다르다는 것에 있었다페드로 아루페는 1972년 독일의 가톨릭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신앙의 위기는 물질주의나 무제한적인 신학토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실존이 처해있는 야만적인 비참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1981년 로메로 대주교 1주기를 맞이하여 페드로 아루페와 수도회 장상연합회에서는 1주기 기념식을 조직하였다하지만 바티칸은 침묵을 지켰다.


더 큰 위기는 1977년 페드로 아루페가 침묵이 맑시즘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을 때 찾아왔다당시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 맑시즘의 여러 측면들특히 그 분석과 철학을 분리해내는 것을 부정한 상태였다그는 1980년 12월 8일 총장서한 <맑시즘 분석에 관하여>를 배포했이 서한에서 아루페는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맑시즘의 분석에서 일부 방법론적 관점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물론 이런 관점들만을 채용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예컨대 경제적인 요인에 주목하는 것자산과 관련된 구조나 경제적 이해관계계급 전체를 희생시키는 착취에 대한 예민한 감각역사 속에서 계급투쟁의 역할, 기득권의 이해관계와 불의를 은폐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루페와 예수회가 맑시스트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전체적인 해결책으로서의 맑시즘을 배격하는 데에는 그 태도가 분명했다. 당시 예수회에 비판적이었던 바티칸의 주교들을 가장 화나게 만든 것은 반공주의가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듯한 암시였다마지막으로 우리는 또한 맑시즘 분석에 대해서 우리가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그리고 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신이나 그들을 착취하는 이들에 대항해서 권리를 보호하고 적법적인 주장을 하는 것을 폄하하는 것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마무리되었다우리는 자주 반공주의가 불의를 숨기는 수단이 되었던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1981년 봄에 나온 이 서한에 대해 바티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예수회의 총장이 범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발언할 자격이 있냐는 비판과 예수회 총장이 자신만의 교도권을 구축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까지 제기되었다.


만약 이 사건들이 일어난 지 고작 두 달 만에 페드로 아루페가 뇌졸중을 얻지 않았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지 모른다그 전부터 이미 교황의 개인적인 대리를 예수회의 수장으로 삼는 일이 논의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놀랍게도 1981년 6월 장 클로드 디취 신부가 펴낸 자신의 전기를 읽고 나서 페드로 아루페는 이렇게 말했다이미 마음이 내 삶의 마지막 아멘을 소리 내고 있고 영원 속에서 내가 머무는 것에 대해서 최초의 알렐루야를 소리 내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완전히 불구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최악인 것은 그의 정신은 또렷했으나 자신을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그를 대신할 개인적인 대리인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고 그와 그의 팀은 불신 받고 있었다.


1981년 10월 31결국 교황이 총장 대리인으로 임명한 예수회원 파울로 데차 신부가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예수회 총원에서 미사가 거행되었다강론을 마치며 데차 신부는 예수회가 과거 얼마나 어두운 삶과 가장 어려운 순간들’ 속에서 고통을 받았는지를 강조하였다이 때 구석의 휠체어에 앉아있던 페드로 아루페가  갑작스런 움직임을 보였다그는 데차 신부를 불렀다그리고 전체 공동체 앞에서 그를 껴안았다이는 페드로 아루페와 예수회가 그를 받아들인다는 가시적인 순명의 표시였다데차 신부가 대리를 맡으면서 일부 예수회원들은 인사의 대변동을 예상하고 있었다그러나 데차 신부는 예수회의 총원 팀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관구장들 역시 제자리를 지키게 하였다뿐만 아니라 아루페 신부의 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하였다. 만약 예수회원들이 정치적으로 편향되었고 맑시스트이자 세속주의에 찌든 인간들이었더라면 그들은 이미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예컨대 모두가 총사직하거나 항의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예수회원들이 시험을 통과했다.라고 말했다1983년 933차 예수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전의 총회에서 전혀 없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33차 총회에서 총장의 사임이 받아들여졌다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몇 마디의 말을 적었고 스페인 관구장 이냐시오 이글레시아스 신부가 이를 읽었다.


이전보다도 더 저 자신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이것이야말로 제가 어린 시절부터 온 생애 동안 원해왔던 것입니다하지만 지금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주도권이 온전히 하느님께 있다는 것입니다누군가가 온전히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참으로 심원한 영적 체험입니다. 예수회에그리고 나의 형제인 예수회원 각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그들이 이 가련한 총장에 대한 신뢰와 순명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여러분 모두에게 이 말이 진심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예수회가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님 밑에서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이 가득 차오릅니다이 여정이 계속되기를 빕니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제와 수사들의 좋은 성소로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이를 위해 제 남은 삶을, 그리고 저의 기도와 제 병환으로 겪게 되는 고통 모두를 주님께 봉헌하겠습니다."

 

첨부파일 : 전체 번역본 (변역 : 김민 사도요한 SJ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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