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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보편적 사도적 선택 (UAP)란 무엇인가 - 필립 엔딘 신부 (Fr. Philip Endean, 영국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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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17:09 491 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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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4일 영국관구 관구모임에서 필린 엔딘 신부가 발표한 내용을 엔딘 신부가 수정하여 배포한 글을 번역한 것임. 


보편적 사도적 선택 Universal Apostolic Preferences (UAP)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는 네가지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이야기할 때 사실 우리는 네가지의 열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 영신수련과 식별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2. 우리의 화해와 정의의 사명 안에서 가난한 이들, 세상에서 쫓겨난 이들, 그 존엄성이 훼손된 이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 

3. 희망 찬 미래를 만들어가는데 젊은이들과 함께 하기. 

4. 우리의 공동의 집을 돌보는데 함께 협력하기. 


공식적인 문서들에서도 표현이나 순서가 조금 다르게 나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을 단순한 명사, 예컨대 영성이나 생태/환경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을 함축하는 구절들, 행동을 의미하는 동사들이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반포하는 편지에서 소사 신부는 이 선택들이 “주님의 사명에서 협력하기 위한 최선의 길, 이 시대의 교회를 섬기기 위한 최선의 길, 보다 큰 거룩한 봉사와 보다 보편적인 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으면서 우리의 신원과 우리의 자원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를 발견”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향후 10년을 위한 프로그램의 출발점이 된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어디에서 비롯했는가?


식별의 과정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있다. 소사 신부가 총장직에 오른 직후 2017년 여름으로 거슬러간다. 예수회 제36차 총회에서는 소사 신부에게 기존의 보편적 사도적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이를 갱신할 필요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2017년 가을, 소사 신부는 우리 모두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를 예수회원들과 사도직 협력자들 모두가 반드시 참가해야할 공동 식별의 과정으로 초대하였다. 공동식별의 결과물들은 밑으로부터의 의견수렴을 거쳐 점차 로마로 모여들게 되었고 마침내 대략 25명 정도의 확대 자문회의에서 지난 1월 마지막 주의 기나긴 모임 속에서 검토가 되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이렇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올 때의 식별과정은 고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상위 기구로 올라오면서 식별과정은 현저하게 향상되었고 관련된 이들 역시 점점 행복감과 위로의 체험에 젖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결과물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제출되었고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으로 되돌려 받았다. 이제 사도적 선택은 단순히 예수회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성령에 귀를 기울이며 여정을 진행하였고 교황으로부터 인준을 받은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예수회적으로 보일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인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혹자는 만약 다른 교황의 통솔 아래에서도 우리가 과연 마찬가지의 시도를 했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우리의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 장면은 1540년에 있었던 교황 바오로 3세와 1550년의 교황 율리오 2세 때의 과정-바로 예수회의 설립을 인준하였던-을 떠오르게 한다. 그 때 역시 모든 예수회원들이 모여서 숙고와 식별의 과정을 거쳤고 이어서 문서를 작성하여 교황에게 제출하였다. 또한 그 때 역시 그 문서는 교황의 권위가 더해져서 우리에게 되돌아왔었다. 그 때 역시 공동식별이 있었고 예수회에 사명-미션-이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통보되었던 것이다. 


이전의 우선순위/선택

식별 과정 동안-아마도 그 이전에 이미- ‘보편적 우선순위 universal preference’라는 말의 의미는 변화하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선순위/선택은 우리 모두를 일상의 기반 위에서 영감을 불어넣는다는 뜻이다. 이 선택은 모든 예수회원들과 예수회 사명과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할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있다. 혹은 페드로 아루페 신부가 사용했다고 잘못 오해받는 문장을 사용해서 말하자면, 이 선택은 우리에게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콜벤바흐 총장이 2003년 그의 보편적 사도적 우선순위/선택을 공식화했을 때, 이 선택의 목적은 지금과는 달랐다. 지구와 관구에서의 사도직 계획에서 간과될 수 있을 보편적 필요성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콜벤바흐 신부는 다섯가지 대답을 했었다. 아프리카, 중국, 지성사도직, 예수회 로마 국제공동체, 난민. 15년이상이 지난 지금 과연 얼마나 많은 예수회원들이 콜벤바흐 신부의 목록을 주저없이 읊을 수 있을지 나로서는 회의가 든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에 관한 콜벤바흐 신부의 목록은 우리 모두를 매일 매일 움직이게 만드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요하지만 우리가 하지 못했던 것들, 그렇기에 더 특별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한 것들에 관한 것이었다. 콜벤바흐 신부를 움직였던 이 질문은 여전히 중요할 뿐 아니라 아마도 시급한 것이리라. 우리는 그렇기에 두 가지 종류의 보편적 선택이 필요하다. 양성 파트에서 일하는 나는 관구의 통솔이 우리 사도직의 일부 목적을 달성하는데 잘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소사 신부가 2월 19일 편지에서 인정했듯이, 이 새로운 보편적 사도직 선택은 콜벤바흐 신부가 추구했던 바에서 비롯하는 것이지 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아죠르멘토/현대화 aggiornamento와 적절한 쇄신 renovatio accommodata

소사 신부와 콜벤바흐 신부의 과정 모두 더 장기적이고 폭넓은 맥락에서 조망되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20세기의 인류 문화는 심대한 변화를 겪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 자신을 찬찬히 살펴보고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고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을 우선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모든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동시대의 필요, ‘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면서 우리의 원천과 카리스마로 돌아가는 방식(Perfectae caritatis, 2번)으로 적절한 쇄신 renovatio accommodata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업은 거대한 것으로, 우리는 실로 두 세대에 거쳐 수행해왔다. 이는 또한 계속되어야할 과업이며 반복적으로 우리가 행해야할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모든 총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회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새로운 언어로 정의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65년에는 무신론에 대한 저항으로, 1975년에는 신앙과 정의의 증진을 위한 투쟁으로, 1995년에는 신앙 안에서의 여러 활동, 정의를 위한 활동, 종교간의 대화, 문화와의 연관으로, 2008년과 2016년에는 화해의 사명으로 정의되었듯이 말이다. 이러한 비전들을 표현한 문서들은 매우 어렵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200명 이상의 다국적 모임에서 두어달 정도 안에서 작성되어야 했고, 게다가 참가자들이 큰 목소리로 다양한 의견들을 피력하는 가운데 절충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사 신부는 다른 과정을 시도하였고 다른 결론에 다다랐다. 위원회에서 빠르게 문서를 만드는 방식 대신, 우리는 오랫 기간 동안의 식별과정을 가졌다. 사목신학 혹은 실천신학에 관한 논문 대신 우리가 손에 쥐게 된 것은 각 한문장으로 표현된 네 개의 영감으로, 비록 주석이 붙긴 했지만, 이 네 개의 문장들이 우리의 향후 10년 동안의 우리의 활동을 이끌어줄 터였다. 내 의견을 감히 피력하자면, 이렇게 나온 것은 다른 어떤 총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문서보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일관성 있으며 보다 잘 쓰여진 것이었다. 오늘날 예수회 사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식별을 촉진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걷고 젊은 이들의 곁을 지키며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데 식별하는 것. 



총장은 보편적 사도적 선택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가?


은총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기

사소한 정보 하나를 나누고자 한다. 이번 달(2019년 4월) 로마에서 각기 다른 두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이 모임에서 총장이 연설을 했었고 다른 모임에서는 총원 식별과 사도직 계획 보좌관인 존 다디스 신부가 연설을 했었다. 이 두 연설에서 두 분은 이전 부활절에 총장이 우리에게 보냈던 편지보다도 더 분명하게 보편적 사도적 선택이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요구조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관구가 예컨대 ‘라우다토 시’ 공동체를 설립한다거나 청년 사도직을 위한 새로운 센터를 세운다거나 혹은 사회사도직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이지만 부차적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사실 관건이다. 


이들 새로운 보편적 사도적 선택 UAP을 은총에의 개방성의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위자는 하느님이시다. 총장이 출현한 동영상을 보라. 동영상은 다음과 같은 초대로 시작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상상해보자.’ 인간의 계획은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 계획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부활절 편지에서 소사 신부는 우리에게 선택은 ‘우선순위가 아니라 방향성 orientation이다. 우선순위는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택은 방향성이자 표지판이며 부르심이다.’라고 말했다. 나로서는 이러한 명사들의 대조가 얼마나 잘 이해가 될지는 확신이 안선다. 특히 언어권이 다른 곳에서는 특히 말이다. 실재는 관념보다 혹은 최소한 명사들보다는 더 큰 것이다. 우리로서는 더 긴 접근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 


파리의 보좌주교들 가운데 한 명은 예수회 중고등학교 출신이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그가 주례한 두 번의 중요한 전례에 참여했다. 한번은 예수회 전례였고 다른 한번은 축성된 여성들, 즉 수녀들 모임의 전례였다. 두 전례에서 그는 쌩 루이 드 공자그 고등학교-곤자가 성인의 이름을 딴 예수회 명문 고등학교-에서 한 연로한 예수회원이 그의 수도생활 6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내가 예수회에 입회했을 때, 나는 하느님께 굉장한 선물을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차 나는 선물을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짧은 경건한 말에서 우리는 우리의 활동과 하느님의 활동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에 관하여 총장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바는,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들이 우리를 계획이 담아내고 있는 모든 고려사항들을 초월한,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 하느님의 은사가 내려지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분명하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 곳은 바로 취약함으로 가득 찬 곳이고 심지어 위험해 보이는 곳이다. 그곳은 배척받고 쫓겨난 이들, 교회 안에서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이들의 곳이다. 그곳은 다르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청년들, 디지털 원주민들, 아기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태어난 이들의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기후변화의 도전을 마주하는 곳이며 ‘지배적인 경제체계로 인하여 야기된 환경 파괴’에 대응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청하는 곳이다. 


2월에 보낸 편지에서 소사 신부는 계속되는 회심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인준하는 자리에서 첫 번째 선택, 하느님과 영성에 대한 강조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기도하는 마음자세가 없다면 다른 모든 선택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sin esta actitud orante lo otro no funciona)’ 참으로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부분을 맥락없이 강조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흠없는 신심에만 전념하면 우리의 영적 감각은 퇴화될 것이니 말이다. 다른 세가지 선택에도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 역시 우리를 인류가 성장하는 곳으로, 우리의 집단적 위로와 실망이 집중되는 곳으로 안내한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든 형태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도록 이끌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수단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선택들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넘어서는 방향성’인 것이다. 이 선택들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변화를 겪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사도적 기관의 회심 말이다. 이 선택들은 우리의 굽은 부분을 올바로 펴게 해준다.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또 대학사목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20대의 청년들을 그들의 멘토로서 혹은 교수로서 많이 만나게 된다. 최근 예수회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팀에서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청년들과 함께 일하는 드문 경험을 했다. 나는 이런 경험이 도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아마 인생 경험이 더 많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내가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열정과 신선함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좋은 것이다. 이 만남은 나를 덜컥거리면서도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아동 성폭력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재와의 만남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사제품을 받은 직후의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당시 나는 매우 독특한 성격의 예수회원이었던 앨지 세어번 Algy Shearburn 신부의 감옥 사도직을 돕고 있었다. 앨지 신부는 나에게 독방에 수감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도록 초대하였다. ‘이 친구야, 날마다 그들을 방문하도록 신경을 쓰게. 내 생각으로는 우리 주님께서는 독방에 갇힌 이들에게 특히 친절하시니까 말이야.’ 그렇게 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만나는 이들이 성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 자신의 취약함 vulnerability을 돌아보게 되는, 오랜 기간동안의 느린 변화말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 뿐이다. 반복해서 말하겠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과정이다. 


무신론과 세속화

지난번 교황이 우리에게 비슷한 특별한 사명을 주셨을 때, 이는 단순히 위로부터 from above 온 것이었다. 당시에 우리는 공동식별에 대해서 말조차 하지 않았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예수회 제31차 총회에서 페드로 아루페 신부가 총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했던 연설에서 예수회의 교황에게 바치는 특별한 순명을 언급하면서 예수회원들이 ‘문화적 과학적 사회적 진보의 모습으로 종종 위장하는, 오늘날 만연한 무신론’에 맞서는 일을 담당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는 논쟁적이면서 군사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예수회원은 ‘선한 싸움을 할 것이고 잘 조직되고 성공적인 전역(戰役, campaign)을 위해 필요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틀림없이 미카엘 대천사가 승리의 보증자가 될 터였다. [미카엘 대천사는 군인의 수호자임]


바오로 6세는 가끔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이었다. 하지만 바오로 6세가 초대했던 큰 변화에 대해서 모임에 있었던 예수회원들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소사 총장이라면 바오로 6세가 발표한 “현대의 복음선교 Evangelii Nuntiandi”와 같은 문헌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도출해내었으리라. 물론 우리는 예전 형태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세속주의에 맞서야 한다. 하지만 ‘세속사회’는 긍정적인 무엇인가이다. ‘인간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현존을 갱신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대의 징표’로서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문화에 적합한 종교적 표현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숙한 세속사회에서 사회적 민족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종교적인 회심에 우호적인 조건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르기를 선택할 수 있다.’ 세속화는 어떤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층위의 그리스도교적 성숙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러한 비전은 도전적이긴 하다. 아마 우리는 이에 아직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리라. 하지만 여기에 우리가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42de49a1db087089d1c680f190c5a77b_1562659658_5121.jpg 필립 엔딘 신부 (Fr. Philip Endean, 영국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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