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메시지] 아르투로 소사 총장 아시아 태평양 지역구 주요장상회의 개회사 (홍콩, 2019.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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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여러분 모두에게 아침인사를 드립니다. 홍콩에서 여러분과 함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또한 중국관구가 보여준 대단한 환대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1. 지금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 자신은 온전히 개방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도전은 여러분 마음 속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아시아 태평양이라는 특정한 맥락 안에서 살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바로 이 ‘식별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식별의 공동체는 성찰과 논의의 공간입니다. 집단으로서 함께 걸을 때 우리는 전세계적인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회, 특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예수회의 사도직 몸체의 사명에 있어서 이 변화가 초래하는 도전에 대해서 공통의 비전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모임들은 공동식별을 통해 식별된 바를 우리의 파트너들과 나누고 실천하려는 과정의 일부분입니다. 이 때 비로소 지역구 전체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저는 성령께서 예수회가 스스로를 온전히 쇄신하라는 초대를 강하게 하고 있다고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제36차 총회를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우리 카리스마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제36차 총회 이후 우리는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향한 탐색의 여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우리를 시대의 징표에 충실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삶과 사명의 변화의 방향을 정하는 공통된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 여정은 교황이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승인하면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황의 승인을 통해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교회로부터 받은 사명이 되었고 다양한 지체들을 하나의 몸체로 통합하는 사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3. 교황으로부터 받은 이 사명을 예수회에 전파하는 경험을 통해 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변화의 깊이와 복잡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브리튼 관구 총회에서 필립 엔딘 신부님은 보편적 사도적 결정의 과정은 초기 동료들의 경험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장면은 1540년에 있었던 교황 바오로 3세와 1550년의 교황 율리오 2세 때의 과정-예수회의 설립을 인준하였던-을 떠오르게 한다. 그 때 역시 모든 예수회원들이 모여서 숙고와 식별의 과정을 거쳤고 이어서 문서를 작성하여 교황에게 제출하였다. 또한 그 때 역시 그 문서는 교황의 권위가 더해져서 우리에게 되돌아왔었다. 그 때 역시 공동식별이 있었고 예수회에 사명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통보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선순위/선택은 우리 모두를 일상의 기반 위에서 영감을 불어넣는다는 뜻이다. 이 선택은 모든 예수회원들과 예수회 사명과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할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혹은 페드로 아루페 신부가 사용했다고 잘못 오해받는 문장을 사용해서 말하자면, 이 선택은 우리에게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링크 참고) 엔딘 신부님이 말씀하셨듯이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는가에 관한 것이다.” 마음과 행동의 회심을 위한 토대가 되는 경험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이냐시오 로욜라의 삶을 변화시켰던 만남이며 우리의 삶(사명)을 마찬가지로 변화시키는 만남입니다.
4. 예수회는 변화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이지만 쉽게 지각되지는 않는 변화의 순간을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경고를 기억합니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 37-39)
주님께서 주신 경고의 마지막 문장을 간과하지 맙시다. 우리는 사도적인 삶과 활동의 방식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의 삶-사명의 양식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좋아보일 뿐만 아니라 최선으로 보이며, 모종의 만족감으로, 그리하여 그다지 다른 것을 원치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된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로 생각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급격한 변화는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기에 따라가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부어 담도록 초대받은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체험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사명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포도주 부대인 셈입니다. 새로운 현실에서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이 불편심과 내적인 자유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부르심을 지각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님-그 사명이 십자가라는 걸림돌과 어리석음에서 태어난-을 따르는데 보다 실천적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코린토 1, 17-30)
제36차 총회는 협력과 네트워크를 우리 사명이 요청하는 변화의 두 가지 필수적인 차원으로 삼았습니다. 협력과 네트워크는 우리 사명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두 가지 핵심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교회에 위임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있어서 다른 이들의 협력자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협력과 네트워크를 예수회를 통솔하는 우리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습니까? 제가 받은 느낌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 활동의 협력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제 막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협력자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사도직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자기지시성 self-referentiality의 유혹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사명이 마주하는 도전들과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해서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의 결정이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도록 만드는 공동식별의 필요성에 대해서 더더욱 명료하게 깨닫게 됩니다.
5. 이제 저는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예수회의 사도적 몸체에 속한 다양한 그룹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몇 가지 차원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세속사회를 시대의 징표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사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과 화해에 기여하는 길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이라는 말은 원래 우리에게는 나쁜 것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세속화를 어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속화는 우리에게 예수회가 회복해온 ‘문명’의 ‘가톨릭적’ 과거에 대한 향수에 잠기게 합니다. 우리가 쉽게 알아채는 것은 세속사회와 세속화에서 발견되는 가능성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세속화의 극단과 위협에 관해서 입니다. 세속사회를 ‘영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세속사회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며 가난하고 배제된 이들의 울부짖음에 귀기울이며 그들과 함께 정의와 화해를 향한 여정을 찾아야 한다는 도전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동시대인들이 마찬가지로 그러한 예수님을 따르도록 어떻게 초대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우리가 우리의 카리스마에 충실하게 살고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불가피하게 마주해야할 질문입니다.
세계화된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차원은 우리의 앎, 생활양식, 양성, 행동양식을 ‘국제화'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국제화’라는 말은 영역이나 인종적 문화적 소속과 같은 ‘민족국가’가 사람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이전의 역사적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세계화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교회 안에서의, 수도공동체와 사도직에서의 삶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속에 있는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새 술의 한방울도 흘리지 않을 새로운 술부대에 필요한 불편심의 태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오늘날 예수회의 보편적 사도직 몸체는 다문화적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입니다. 예수회의 보편적 사도적 몸체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적 맥락 안에 살고 있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께서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방식의 어떤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든 인간 문화에 체화되어 있으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며 죄의 용서를 통해서 문화를 변화시켜줍니다. 사도행전을 다시 읽어보면, 우리는 다시 어떻게 성령께서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해주고, 많은 저항들을 극복하고 최초의 사도들의 문화를 확대하며, 다른 문화들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여 세상 모든 곳에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러한 긴장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은 우리 예수회의 내부에 항존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다문화성을 보물로 받아들이고 의식적으로 상호문화성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6. 지난 총회들은 인류 역사의 변화의 복잡성과 속도, 그리고 우리의 삶-사명에의 영향을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총회들은 우리의 통솔의 형태를 갱신하고 재구조화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회가 설립된 이후 ‘사람, 시대, 장소’라는 환경에 응답하는 사도적 활동을 지탱하기 위해 유연한 구조가 고안되었습니다. 우리의 통솔구조에 대한 창조적 충실성은 어떤 황금율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통솔 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반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사명이 우리의 구조에 복속되었던 것입니다. 지난날 그토록 성공적이어서 우리가 익숙해져버린 구조에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회의 통솔구조를 결정하는 원칙에는 사도직 몸체의 삶(사명)의 보다 나은 통솔을 위한 대담함과 신중함의 태도와 함께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재구조화’에 관한 좋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는 지역적인 구조조정이나 예수회원의 재배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만약 보편적 사도적 선택이 한 개인의 회심 과정의 가속화와 예수회의 계속된 변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면, 모든 사도직 통솔과 관련된 의제에 있어서 통솔의 재구조화가 영속적인 지향점이 될 것이라는 것이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7.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우리가 교황께 확인받은 식별로부터 사도적 몸체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요청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선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이해하고 이에 동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보편적 사도적 선택이 선포되었다고 보편적 사도적 선택이 실현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모친이신 선모님께 기도드립시다. 애정어린 그분의 기도를 청합시다. 하느님을 특별하게 경험하시고 그분 아드님과 친밀하게 사랑하시어 당신이 성령께서 인도하도록 허락하신 성모님께 말입니다.
2019년 7월 22일. 아르투로 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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